한국이 일본 수준의 우라늄 농축·재처리 권한을 노리는 가운데 핵심은 미국의 비확산 철칙 속에서 어떻게 한국만 예외를 인정받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측면에서 모범국이자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임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미국 원전 산업과 국제 비확산 체제 유지, 더 나아가 중국·러시아 원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일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 계기에 원자력 분야 협력과 관련해 의미있는 논의가 있었다"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각 분야에서 협력을 진전시키기 위해 양국은 계속해서 논의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유효기간이 10년이나 남은 협정을 조기에 개정하는 ‘정공법’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플랜B'로는 현행 협정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권한을 확보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입장에서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농축을 통해 우리도 연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왔다”며 “협정을 개정하든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미국과 합의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한·미 고위급위원회 협의 등에 따라 양측이 서면 약정을 체결하면 한국이 20% 미만의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있다(11조)고 규정한다. 미국이 승인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난 10년간 농축과 관련된 진전은 없었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는 전면 금지돼 있다.
이론적으로는 미국산이 아닌 물질과 장비를 사용할 경우 농축·재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동맹 관계를 고려할 때 미국 외 국가와 이런 수준의 원자력 협력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핵무기로 전용이 불가능한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도 여러 제약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허용된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안정성을 위해서도 협정 개정이 필수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국은 현재 26기의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연료를 전량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고 그중 3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 등을 고려하면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최소한의 농축 권한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협정의 중지·개정 여부는 전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판단에 달렸다는 지적이다. 협정 합의의사록에 따르면 ‘핵확산 위험’이나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협정 이행이 중지될 수 있으며, 이런 결정은 각국 정부의 최고위급에서만 내려지고 상대국에 서면으로 통보한다. 정부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권을 쥔 구조에서 정상 차원에서 첫발을 뗀 건 의미 있는 진전"이라며 "국무부, 에너지부 등 관련 부처도 본격적인 검토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7년 동안 멈춰 있던 한·미 원자력 고위급위원회(HLBC)가 조만간 재개될 거란 관측도 나온다. HLBC는 협정이 개정된 2015년 설치됐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기조와 맞물리고 2017년부터는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한·미 원전 업계 간 갈등까지 겹치면서 2018년 이후 중단됐다. 2022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HLBC를 활용한 원전 분야 협력 방안 구체화”가 주요 성과로 명시됐고 양국이 재개 의지를 밝혔지만, 실제 가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국의 원자력 권한 확대 논의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정부는 조선업과 마찬가지로 원전 분야에서도 한국이 업계 부활을 위한 최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만큼 '족쇄'를 풀어달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협정 개정이 미국의 비확산 체제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15년 한·미 원자력 협상 당시 부대표를 맡았던 김건 국민의힘 의원은 "한국의 농축·재처리 권한 확보는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며, 나아가 미국의 비확산 구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어 “전 세계가 중국과 러시아 원전에 의존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또 다른 원전 강국인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기술 독립을 선언했고 경쟁력도 약화한 상황이어서 현재 미국의 원천기술을 활용하며 신뢰할 수 있는 협력국은 사실상 한국뿐”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한국에 농축·재처리 권한을 허용할 경우 미국은 다른 동맹·우방 사이에서도 핵확산 도미노가 일어날 가능성을 경계할 수 있다. 앞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골드 스탠더드’(농축·재처리 불허) 없는 원자력 협력을 요구했다. 한국은 2015년 협정을 개정하며 골드 스탠더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여기에 농축·재처리 권한까지 확대될 경우 다른 동맹과 우방도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