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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시각각] 씨앗 뿌리려면 밭도 좀 갈아야지

중앙일보

2025.09.01 08:24 2025.09.0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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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대해 “뿌릴 씨앗이 부족하다고 밭을 묵혀두는 우(愚)를 범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에 앞서 민간 전문가와의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도 “지금 씨를 한 됫박 뿌려서 가을에 한 가마를 수확할 수 있다면 당연히 빌려다 씨를 뿌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확장 재정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통령의 ‘씨앗론’이다. 큰 틀에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확장재정 강조한 정부의 ‘씨앗론’
마중물 되려면 기업 환경이 중요
밭은 안 갈고 노란봉투법이라니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3일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엔 무조건 건전재정을 고수하자는 주장이 별로 없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금과옥조로 여겼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2019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40% 근거가 뭐냐”고 재정당국을 몰아세웠던 것처럼 40%의 근거는 딱히 없다. 그래도 우리가 기축통화국이 아닌 만큼 국채를 부담 없이 찍어내는 기축통화국보다 긴장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예산안을 보면서 내년 국가채무 1415조원, 국가채무비율 51.6%라는 숫자에 눈길이 갔다. 국가채무 1400조원 시대가 열리고 국가채무비율 50%대가 처음으로 뚫리는 것이다. 중기 계획인 국가재정 운용계획(2025~2029)이 끝나는 2029년의 국가채무비율을 50% 후반 수준(58%)으로 관리하겠다는데 글쎄다. 내년에만 110조원의 적자국채를 찍고 국채이자 부담은 내년 36조4000억원에서 2029년 44조원까지 늘어난다. 이런 이자를 포함해 매년 100조원 넘게 국가채무가 따박따박 불어난다. 그래도 정말 괜찮을까. 몇 가지 걱정이 든다.

첫째, 나랏빚이 늘어날수록 외국인 투자에 휘둘릴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 국채 4분의 1을 외국인이 들고 있다. 한국 국채가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되는 내년 4월 이후에는 외국인 보유가 더 늘어날 것이다. 외국인 자금 75조~90조원이 국내 채권시장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외국인이 우리 국채를 많이 사주면 좋은 일이다. 조달금리가 내려가니 이자부담을 덜 수 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여기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이 터지면 외자 유출로 시장이 출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의 달러 약세 국면이 강세로 바뀔 때 개도국의 달러 가뭄이 심해지고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도 흔들릴 위험이 있다.

둘째, 곳곳에 낙관적 전망이 보인다. 정부는 경기 회복으로 국세 수입이 내년 390조원으로 늘고 2029년 457조원까지 연평균 4.6%씩 늘어날 것으로 봤다. 한데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대선 직전인 올해 3월 전문가들과 공저한 『잘사니즘』에 쓴 글에서 “한국은 2022년 395.9조원을 피크로 세수가 감소 추세에 접어든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가 크다”고 분석했다. 이랬던 비관론이 왜 달라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세수가 줄었던 2023~2024년보다는 올해와 내년 상황이 나아지겠지만 증세와 추가 세원 확보를 포함한 세제 개편 없이 경제성장률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까지 세수가 추세적으로 늘긴 힘들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2026년 예산안 및 2025~202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셋째, 힘든 길은 애써 피해갔다. 비과세·감면 등으로 깎아주는 조세지출은 올해보다 4조원가량 늘었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같은 굵직한 비과세·감면은 손대지 않았다. 역대 최대인 27조원의 지출 구조조정을 했다고 내세우지만 올해보다 3조원 늘어난 수준이다. 정부는 생색을 내지만 박수받기 힘들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씨 뿌리려면 밭부터 갈아야 한다. 미리 넉넉하게 퇴비를 줘서 땅심도 키워주고 김도 매야 한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재정이 경기 회복과 혁신의 마중물이 되려면 기업 투자가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소주성(소득주도 성장)’에서 봤듯이 재정 주도 성장의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 기업에 연타를 휘두른 상법 1, 2차 개정과 노란봉투법은 정부의 ‘씨앗론’이 성공하기 위한 밭 갈기와 퇴비 작업이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서경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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