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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마음 읽기] 감동의 순간

중앙일보

2025.09.02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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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더위가 물러가지 않으니 이러다 가을이 오기나 할까 싶다. 옆집 할머니는 요즘 이른 아침마다 무화과나무밭에 나와 계신다. 무화과를 따신다. 지난주 어느 날 아침에는 나를 보시곤 “이거 먹을래?”라고 말씀하시며 익은 무화과를 그릇에 담아서 주셨다. 나는 텃밭으로 가서 끝물 참외를 따서 그 그릇에 담아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향해 웃으셨다. 무화과가 익고 있는 밭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을이 머잖아 오긴 할 것 같다. 그러나 가을은 언제 올 것인가. 그저께 아침에는 감나무 아래에서 흙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매미를 보았으니 매미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날이 곧 오긴 할 것이다.

후배들 위해 문학상 만든 시인
생명의 빛에 대한 스님 가르침
삶의 스승은 어디에나 있으니

김지윤 기자
최근에 시조를 쓰는 고성기 시인을 찾아뵈었다. 시인은 제주 한림에서 태어난 분인데, 연세가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많다. 선생은 산 아래 집을 짓고 당호를 ‘정류헌(情流軒)’이라고 붙였다. 집 주변에 천미천이 흐르고 있어서 집의 이름을 ‘정이 흐르는 집’이라는 의미인 정류헌으로 지었다고 했다. 선생에 대한 얘기를 여러 번 전해 들었으나 뵙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당에는 정원수로 감나무를 심어 놓았고, 감나무의 수령이 제법 많아 보였다. 둥치가 굵고, 키가 컸다.

선생의 집에 들른 것은 선생이 후원하는 문학상의 심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문학상의 이름은 ‘늘물섬문학상’이었고, 올해 제1회 수상자를 낼 거라고 했다. 섬과 섬사람을 노래한 미발표 창작 시조를 공모해 수상할 계획이라는데, 문학상 상금을 올해부터 20년 동안 선생이 사비로 후원한다고 했다. ‘늘물’은 선생의 스승이 ‘늘 물처럼 맑게 흘러야 한다’는 뜻으로 지어준 선생의 아호(雅號)였다. 선생은 내게 말하길, 그동안 받기만 했으니 이제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는데, 그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시조를 짓는 어른이 시조를 짓는 후배를 격려하고자 손수 자비를 들여서 상을 준다는 취지이니 그 뜻이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

심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선생의 시와 산문을 다시 읽었다. 산문에서 “우리는 거친 파도에 둘러싸인 작은 섬일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고해(苦海)를 혼자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해에 뿌리 뻗고 버티어 홀로 선 바위섬! 이게 인간이리라”라고 쓴 대목에서는 섬에서 태어나 자란 섬사람의 강한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선생의 어머니께서 생전에 백난아의 ‘찔레꽃’을 즐겨 노래하셔서 어머니의 기일에 어머니의 영정 옆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그 노래를 불러드렸다는 일화는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를 쓰는 수행자인 승한 스님의 새 시집을 우편으로 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스님의 시편 가운데 ‘꽃밭에서’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다. 시의 일부는 이러했다. “꽃밭에 나의 외부가 눕는다/ 꽃밭도 제 외부를 눕힌다/ 내가 눕는 꽃밭의 면적과/ 구겨진 꽃밭의 면적은 항상 같다/ (…) / 꽃밭 속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대적(大寂)이 있다/ 광배(光背)가 있다/ 꽃밭에 나의 외부가 눕는다/ 꽃밭을 광배로/ 나의 내부를 눕힌다”

시인이 실제로 꽃밭에 누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누웠다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다. 몸이 꽃밭에 눕자 꽃밭이 구겨진다. 누운 면적만큼 꽃밭의 면적이 동일하게 구겨진다. 그런데 시인이 꽃밭에서 돌연 발견하는 것은 시인과 꽃밭 외에 꽃밭에 거주하고 있는 대적과 광배이다. 대적은 큰 고요를 일컫고, 광배는 등 뒤에 있는 밝고 환한 빛을 일컫는다.

꽃밭은 꽃이 피는 아주 화려한 공간이요, 아울러 태어남과 죽음, 개화와 낙화, 번성과 쇠락이 활동하는 공간일 테다. 그런데 거기서 시인은 모든 장소와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는 고요와 생명의 빛을 본다. 그리고 그 고요와 생명의 빛에 마음을 눕힌다. 우리가 이 일과 저 일을 하고,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어떤 이와 만나고 헤어지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의 내면에는 대적과 광배가 늘 있다고 노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시집을 덮고 깊은 생각에 빠졌고, 마음이 어느 때보다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가르침을 받은 순간이었다.

어제 새벽에는 내 사는 동네에 많은 비가 쏟아졌다.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었다. 바깥에 나갔더니 빗소리가 빈틈이 없이 사방에 가득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옆집 밭의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섬처럼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더니 빗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움켜쥔 대적과 광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요란한 이 여름이 겉으로 이제 지나가고, 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올해 여름에는 고성기 선생과 승한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삶의 매 순간이 감동이고 기적이지만, 가을에는 또 다른 삶의 스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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