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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의 브뤼셀의 창] ‘영국판 트럼프’ 패라지, 불법 난민 강제송환 주장하며 영국 정국 주도

중앙일보

2025.09.02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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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내일 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진다면 누가 총리가 될까.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극우 영국개혁당(Reform UK)의 나이젤 패라지 당수가 될 것이다. 집권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현 총리가 아니다.

노동당은 지난해 7월 초 하원 의석 3분의 2에 육박하는 압승을 거두고 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그런데 지난 2월부터 집권당인 노동당의 지지율은 변변한 지역구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개혁당에 계속 뒤처진다. 백인 영국인 우선을 내세우는 극우 정당에 말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당조차 강경한 이민정책으로 선회 중이다. 정책을 주도해야 할 집권당이 휘둘린다.

포퓰리즘 내건 극우 정당 약진
경제 부진·복지 삭감 불만 늘자
노동당도 강경 이민정책 선회

영국 하원의원은 지난 7월 말부터 5주간 여름 휴가에 들어갔다. 관련 기사가 뜸할 시기인데 지난주 패라지가 영국 언론을 도배했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집권하면 “50만~60만여 명의 불법 난민을 강제 송환하겠다”고 밝혔다.

도버 해협 등으로 입국하는 불법 난민 신청자가 급증해 “우리 안보를 직접 위협한다”며 “우리는 침략을 당했고 내란 직전의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이를 위해 난민의 강제송환을 금지한 1951년 ‘유엔난민협약’ 적용을 5년간 유예하고 유사 조항을 담고 있는 ‘유럽인권협약’에서도 탈퇴하겠다고 설명했다. 강제 송환을 이행하려 국제법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이다.

언론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진보 일간지 가디언은 패라지의 계획을 “추한 포퓰리즘”이라 비판했다. 반면 보수지 데일리 메일은 “중산층의 바람을 잘 읽어냈다”고 칭찬했다. 보수지는 난민법이 악용됐는데 정부의 미미한 대처에 시민들이 더 화가 났다며 난민의 권리가 시민의 권리보다 더 우선한다고 느끼는 게 민심이라고 봤다.

난민, 경제 제치고 최대 이슈 부상
패라지는 기자회견에서 포퓰리스트임을 강조했다. 그는 “물론 사회 각계각층이 강제 송환과 관련해 우리 당을 규탄할 것이다. 그렇지만 서민의 삶을 개선하는 거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싸움 없이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엘리트 중심의 정치가 부패했기에 서민을 대변하는 그들이 기존 정치를 뒤엎어야 한다고 여긴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할 뿐이라는 혹평을 받아온 개혁당수는 준비된 정치인임을 보여주려 회견을 열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은 5년간 송환 비용이 100억 파운드(약 18조 7000억원) 정도라며 이를 어디서 조달할지 의문을 제기했다. 연간 10만 명 강제 송환도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차준홍 기자
지난달 마지막 주 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민자가 급증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5년 전보다 10%포인트 증가한 70%를 기록했다. 또 지난 6월부터 난민 문제가 경제를 제치고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여겨졌다. 경제가 어려워 각종 복지 지출을 삭감했는데 난민이 들어와 더 삭감됐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실제로 노동당은 집권 후 겨울 난방비 보조를 전체에서 중·하위층 연금 생활자로 한정하는 등 복지를 줄였다. 경제 성장을 외치고 집권한 노동당이지만 영국의 경제는 저성장에 시달려왔다. 지난해 1.1% 성장했으나 올해는 잘해야 이 정도 수준을 기록할 전망이다. 낮은 성장의 대명사인 유럽연합(EU)과 비교해 별 차이가 없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실행하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개혁당의 전망과 정반대다.

패라지는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61세인 그는 대학 졸업 후 런던의 금융서비스 산업에서 일하다가 1993년 소수의 사람과 영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후 1999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브렉시트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구호라 여겨져 놀림감이 됐었지만, 그는 꿈을 이뤘다.

차준홍 기자
이후 2018년 브렉시트당을 창당했고 3년 뒤 영국개혁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지난달 말 기준 정당원은 23만4000명을 돌파해 보수당을 앞질렀다. 오랫동안 정치적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소위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며 지난해 7월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선출돼 제도권에 진입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선거 운동 당시 그는 EU를 탈퇴하면 이민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EU 시민들이 EU 안에서 자유 이동을 하는데 브렉시트 후 이게 폐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버 해협을 통한 난민은 급증해 왔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협약을 체결했고, 지금은 프랑스 당국이 영국으로 넘어가는 난민을 1차로 단속한다.

올해 3만 명 넘은 난민, 뜨거운 감자로
패라지 말대로 영국으로 오는 난민을 대폭 줄이려면 국경 수비대를 보강하면 된다. 전임 보수당 정부나 현 집권 노동당은 난민 문제를 관리할 수 있다며 그러지 않았다. 서민들의 불만이 커져 왔음을 인식한 개혁당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일부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면서 난민은 뜨거운 감자가 됐다. 올 초 2만 명 정도가 해협으로 넘어오리라 예상됐으나 지난달 말 3만명을 넘었다.

차준홍 기자
개혁당과 영국의 극우 세력은 불법 난민으로 인해 이 섬의 주인인 백인 영국인이 소수가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 때문에 채용에서 차별을 겪고 영국 문화와 역사가 평가 절하될 것이라고 공포를 조성한다. 런던 곳곳에 유니언 잭을 내걸며 주인임을 내세운다. ‘낯선 자들의 섬’은 더 이상 이들만의 용어가 아니다. 스타머 총리도 사용한다. 불법 난민을 강경 단속하겠다며 집권당조차 끌려간다. 창당한 지 195년이 된 제1야당 보수당은 3당으로 전락한 채 개혁당에 떠밀려 강경 이민책을 그대로 요구한다.

차기 총선은 2029년 7월 초 이전에 치러져야 한다. 노동당이 민심의 불만이 폭발한 난민 문제에 끌려 다니지만 말고 경제 성장률 제고를 위한 정책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됐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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