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을 아예 안 한다면 모를까, 하는 이상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외교관들이 쓰곤 하는 말이다. 고도의 정치·외교적 행위인 정상회담에서는 작은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에는 이런 명제도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듯 하다. 수많은 국가 정상들이 이미 봉변을 당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차라리 알아서 수모를 자처한 정상들도 있다.
한·미 정상, 신뢰 형성했지만
현안에선 합의문 도출 못해
숙제 여전한 ‘미뤄둔 성공’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간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사전에 ‘최악’을 포함한 수많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동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번 정상회담은 실패하지 않았다.
아니, 트럼프가 모든 걸 결정하는 지금의 구도에서 이 대통령이 그와 친밀감을 형성한 건 분명한 성과다. 비공개 회담에서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신뢰’라는 단어도 여러 번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이뤄진 10여 차례의 정상회담 중 이번 회담 분위기가 가장 좋았다.” 실제로 미 측 당국자가 내놓은 평가라고 한다.
다만 트럼프의 신뢰라는 ‘고가치 자산’을 확보했다고 해도 ‘그래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가 ‘친중·반미’라는 미국 내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건 맞다.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의 종언을 고한 건 보수 정부 대통령들도 차마 못 한 과감한 방향 전환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이 대통령 개인적으로 더 의미가 크지,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반대로 트럼프가 얻은 걸 묻는다면 우리 기업의 1500억 달러 추가 투자라는 답이 쉽게 나온다.
정상회담 관련 보도를 하면서도 제목은 쉽게 뽑히는데, 정작 기사를 채울 내용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이 때문이다. 아무리 문서를 남기지 않는 게 트럼프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라고 해도 결과물 한 장 없이 회담의 손익을 따지는 건 무리였다. 정상 간에 형성된 긍정적 관계는 실무급 논의에 동력을 붙이기 마련인데, 양국이 결국 합의문 도출에 실패한 건 이런 낙수 효과가 충분치 않았다는 뜻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오히려 합의문이 없는 게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가 이미 투자를 약속한 3500억 달러 상당의 금융 패키지와 관련, 미국은 직접 투자의 비율이나 투자처 등을 놓고 무리한 내용을 세세히 문서로 남기기를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무선에서는 합의가 불가능한 민감한 사안도 최고 지도자 간 결단으로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게 정상회담의 미덕이다. 정상급에서 의견 조율을 하지 못한 사안을 실무급에서 다시 진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숙제는 여전하고, 합의를 미뤄둔 만큼 이번 정상회담의 성공도 미뤄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이 귀국한 직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아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80주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사실이 공개된 걸 보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실패하지 않은 데는 이런 외부적 영향도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간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구도에 다소 느슨함이 있었다면, 이는 북·러 간 ‘불량 동맹’을 견제해온 시진핑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승절 행사에서 북·중·러 정상이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 서는 건 시진핑이 이제는 이런 불편함에는 눈감고 3국 간 연대에 방점을 찍겠다는 신호탄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하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김정은이라는 퍼즐의 남은 한 조각까지 맞춰 넣었다.
정부는 김정은의 방중을 한·미 정상회담 전에 파악했다. 중국이 외교 채널로 사전에 알려 왔다고 하는데, 이를 한국에만 알렸을 리 없다. 이 대통령을 만나는 시점에는 트럼프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시진핑이 미국과의 대결을 앞두고 김정은과 푸틴을 불러모아 세를 불리는 마당에 ‘실패한 한·미 정상회담’은 트럼프 입장에서도 곤란했을 터다.
김정은의 이번 정상외교 성과는 어쩌면 한·미 정상회담 결과 만큼이나 중요하다. 속내가 뭐가 됐든 서로를 필요로 하는 북·중은 적절한 수준에서 경제 협력에 합의하며 모양새 좋은 결과물을 도출해낼 것이다. 이는 김정은의 ‘핵 자신감’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게 분명하다. 그들의 실패하지 않은 정상회담은 우리에게는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