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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과 예술은 통한다"…韓日 전통교류 나선 일본인

중앙일보

2025.09.02 23:17 2025.09.0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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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비영리단체 투모로우(Tomorrow)의도쿠다 가요 대표를 2일 서울 효자동 온지음 사옥에서 만났다. 도쿠다 대표 뒤의 그림은 병풍 뒷 부분으로 바다를 상징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효자로에 위치한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1층 전시장.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무늬가 가득한 병풍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일본 교토(京都)의 전통 목판 인쇄 카라카미(唐紙) 장인 가도 고(嘉戸浩)가 한국의 전통을 그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뒷면에는 파도 문양을 그려 바다 건너 양국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임을 상기시킨 것이 특징이다.

이 병풍은 교토에 있는 비영리단체 투모로우(Tomorrow) 대표 도쿠다 가요(徳田佳世·54)와 온지음이 협업한 문화 프로젝트 ‘씨 브릿지’(Sea Bridges)의 일환으로 공개됐다. ‘씨 브릿지’는 한·일 양국의 의식주 문화가 과거로부터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는지를 탐구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다. 지난 6월 교토 북부 교탄고(京丹後)의 해안 마을 레스토랑 나와야(縄屋)에서 한·일 양국 전통 식재료와 조리법을 재해석한 식문화와 상차림을 제안하는 ‘다이닝 콜라보’를 마쳤다. 이번 전시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양국의 장인들이 협력한 공예 작품을 소개한다.

중앙화동재단이 운영하는 온지음은 한국 전통 의·식·주 문화에 담긴 가치와 정신을 계승·현대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도쿠다는 지역 공예가, 셰프 등과 함께 공간을 꾸미고, 지역의 정신이 담긴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다. 일본 베네세 그룹이 주도한 ‘나오시마(直島) 아트 프로젝트’에 오랜 시간 관여해왔던 그는 서도호 작가에게 “당신은 예술가들이 혼신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적합한 사람 같다”는 말에 힘입어 재단을 설립했다고 한다.
사군자와 모란무늬. 온지음의 시그니처 문양이기도 하다. 사진 온지음 홈페이지

2일 온지음 사옥에서 만난 도쿠다는 이번 ‘씨 브릿지’ 프로젝트에 대해 “문화와 예술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한국과 일본) 서로의 문화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다른 문화를 포용하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재해석하기에 더없이 좋은 프로젝트”라고 반겼다. 작품을 재해석할 작가 선정은 프로젝트를 제안한 온지음측이 맡았고, 투모로우 재단에서 구체적인 과정을 진행했다. 도쿠다는 “두 기관과 작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작업을 위해 나무 하나를 고르는 과정에서도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전했다.

3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두 달간 온지음에서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양국의 배첩장인들이 협업해 제작한 두 가지 병풍 이외에도 한·일 양국이 삼국시대부터 바다를 통해 교류한 흔적을 담은 식기류 등의 공예품이 나왔다. 독특한 문양의 손잡이가 인상적인 가야 시대의 잔을 재현한 머그컵, 고려시대 국화무늬 청자 잔을 닮은 식기 등을 볼 수 있다.


전시 마지막 날엔 온지음 레스토랑에서 지난 6월 교토 레스토랑에서 선보였던 음식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이 프로젝트에는 양국의 과거 식문화를 재해석해 미래 세대에 영감을 주겠다는 뜻을 담아 ‘아워 퓨처 밀 2030’(Our Future Meal 2030)이란 제목을 붙였다.
도쿠다 대표는 "어떤 건물을 세울 때 건축가와 예술가가 먼저 정해지고, 개관 직전에서야 셰프가 메뉴를 고르는 방식이 불편하다. 음식과 예술은 나란히 나아가야 한다"는 철학을 밝혔다.

도쿠다는 “삶은 결국 작은 기억들의 축적이라 생각한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전시를 보는 지가 모여 존재의 이유를 만든다. 좋은 음식과 좋은 예술은 이와 같은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다”면서 음식을 단순히 맛의 영역에 두지 않고, 기억을 만드는 문화적 행위로 바라본다고 설명했다.


또 한국에서도 좋은 기억이 있다며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맛본 갈치, 청주의 한 도예가 작업실 근처 동네 식당에서 함께 우엉 비빔밥을 먹었던 순간들”을 소개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는 “친구인 권미원 전 UCLA 미술사학과 교수 소개로 안동의 병산서원에 방문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던 기억”을 꼽으며 “이런 장소와 음식에 대한 여러 기억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마음 깊이 남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됐다”고 밝혔다.
오카야마((岡山)에서 태어나고 자란 도쿠다는 "어렸을 때부터 집 근처의 오하라(大原)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면서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도쿠다가 처음부터 자연과 음식에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다. 15년 전 현대미술이 너무 자본주의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왜 예술을 사랑했을까’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이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큐레이터로서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 계기가 됐다. 투모로우 재단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주변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리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씨 브릿지’ 프로젝트는 내년엔 차를 주제로 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도쿠다는 “온지음과의 협업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평화와 협력에 대한 개인적 소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아시아의 이웃이니, 본질적인 우정을 쌓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면서 종료 기간 없이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황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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