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갈라진 지 55년 만이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평양 순안 공항에 내렸다. 김 대통령은 공항에 마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포옹했다. 분단 후 남북 정상의 첫 만남이었다. 증오와 대결로 점철되다시피 한 역사를 화해와 협력으로 바꾸려는 걸음이었다.
김 대통령은 서울공항을 떠나기 전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2박 3일 평양 일정의 마지막 날 나온 공동선언에 그대로 담겼다.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민족 경제의 균형 발전과 사회ㆍ문화ㆍ체육ㆍ보건ㆍ환경 분야의 협력, 교류 활성화 등이다. 이는 그저 말뿐인 선언이 아니었다. 이후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대강(大綱)이었다. 정상회담 뒤 개성에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공단이 들어섰고, 2005년부터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하기 직전인 2015년까지 11년간 남북 교역액은 매년 10억 달러를 웃돌았다. 남북을 오간 인원이 연간 10만 명을 넘기도 했다.
긴장 완화 분위기에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2002년 3월 한국의 신용등급을 ‘Baa2’에서 ‘A3’로 두 단계 올렸다. 지정학적 이유로 인한,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일부 해소되는 모양새였다. 한반도에 깃들기 시작한 평화의 힘이었다.
정상회담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김 주석이 회담 17일 전에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90년대 후반 들어 남북 정상은 만남에 적극적이었다. 여기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당위성 말고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경제난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경제ㆍ외교적으로 북한을 돕겠다고 적극 나설 우방이 없었다. 옛 소련이 해체된 것을 비롯해 사회주의 정권들은 줄줄이 몰락했고, 중국도 수교 후 남한과 밀착했다. 돌파구는 같은 민족, 남한이었다. 마침 김대중 정부 또한 ‘햇볕정책’을 내걸지 않았던가.
한국도 외환위기에서 조기 탈출하기 위해 남북관계의 안정이 필수였다. 달러가 들어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해외투자 유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 없이 대규모 해외투자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민간 쪽에서도 교류 협력 분위기가 익어갔다. 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 창업 회장이 소 떼를 끌고 북으로 갔고 금강산 관광길도 열렸다.
정상회담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물론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해야 한다고 북측이 주장하는 등(추후 철회)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마침내 4월 8일 합의가 이뤄졌다.
국내에선 "퍼주기만 한다" 비판 여론도
6ㆍ15 공동선언 후 남북은 수많은 고위급ㆍ실무 회담을 열고, 교류 협력에 속도를 냈다. 남북의 접촉면이 늘어나며 북한 내부도 변화가 시작됐다. 정보기술(IT) 산업을 바탕으로 단번에 경제 도약을 이뤄보겠다는 ‘신사고론’이 2001년 등장했고, 이듬해에는 이른바 ‘장마당’을 허용하는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 요소 일부를 수용한 ‘경제 관리 개선 조치’(7ㆍ1조치)를 실시했다. 또한 남한을 적대시하던 데서 벗어나 ‘자신들을 도와주는 우리 민족’이라는 인식이 북한 내부에 확산하기도 했다.
6ㆍ15 공동선언 직후 우리 쪽에서는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퍼주기만 하고 안보에 득이 된 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론을 의식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8월 말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앞두고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을 불렀다. “경제 협력과 안보 협력의 속도를 맞추도록 북한을 설득하라”는 지시였다.
평양에 간 박 장관은 군사직통전화 설치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6ㆍ15 공동선언에 없는 내용”이라며 거부했다. 박 장관은 북한의 형식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면담을 거부한 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겠다”고 버텼다. 그러기를 이틀. 박 장관은 북한이 특별히 마련한 야간열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가 다음날 새벽 자강도 강계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그러곤 남북국방장관회담, 군사핫라인 설치, 개성공단 사업 등 10여 가지 합의를 끌어냈다.
남북 첫 정상회담으로 통일에 한발 다가서는 분위기가 고조됐지만, 남북관계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합의한 회담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넘게 미뤄지는 냉각기도 있었다. 무엇보다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추후 북한은 통일부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사과 전문을 보내왔다.
김대중 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요동쳤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며 한반도는 한때 격랑에 빠졌다. 그러고선 이듬해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난 이명박 정부 때는 대립 일변도였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피격되는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은 멈춰섰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했다. 이듬해 1월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며 정상회담 용의를 내비쳤다. 하지만 2016년 초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연거푸 발사하자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다. 남북관계의 옥동자로 여겨졌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사망선고를 받고 말았다.
악화일로였던 남북관계는 2018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면서 온기가 흘렀다. 그해에만 세 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그러나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급전직하했다. 대북 전단살포 등을 이유로 2020년 북한은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한때 연간 10억 달러를 넘던 남북교역과 10만 명 이상이었던 남북왕래는 윤석열 정부 들어 ‘0’이 됐다. 북한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관계”라 규정했고, 지난해 10월에는 남북을 잇는 경의선과 동해선 국도를 끊었다.
김정은·트럼프 회담 올해 안에 열릴까
작금의 한반도는 전쟁도 없지만 평화도 없는 상태다. 주변 열강인 미국과 중국 간에는 갈등과 경쟁이 지속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시 김 위원장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지난 25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ㆍ미 정상회담 때 트럼프는 “올해 안에 김정은 위원장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북한은 두 정상 간의 친분을 인정하면서도 ‘핵 보유를 받아들일 것’ 등의 조건을 제시한다. 동시에 김정은은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여해 정상회담을 하는 등 북ㆍ중ㆍ러 동맹 강화를 통해 한반도에 긴장을 높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오는 10월 10일 북한의 당 창건 80주년 열병식과 내년 1월 제9차 당대회다. 열병식에서 신형 무기를 어느 정도 과시할 것인가, 또 당대회에서 대남ㆍ대미 정책에 대한 조정 신호가 나올 것인가 등이 향후 남북관계를 가늠할 방향타가 될 것이다. 트럼프의 만남 요청에 김 위원장이 호응하느냐도 관심거리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의 좋은 점은 계승하고 부족한 것은 개선하면서 역사는 발전한다. 과거를 보면 남북은 대화 속에서 북한의 핵전력 완화 같은 해법을 찾았고, 대결 속에서는 해악이 찾아왔다.
6ㆍ15 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가능성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불과 몇 년이긴 했지만 우리는 6ㆍ15가 가져다준 평화의 힘을 누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 80주년 경축사에서 6ㆍ15 공동선언 등 기존 남북합의를 존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도 협력적 상생이 서로 윈윈하는 밑바탕이라는 점을 꼭 상기했으면 한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난다.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아니라 ‘역지사지(易之思之)’의 자세가 문제 해결의 마중물이다. 대화채널 복원을 통해 남북한의 손뼉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