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이 “기업 규모별 규제를 풀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4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업성장포럼’ 기조연설에서 “기업 규모별 규제가 존재하는 한 기업 입장에서는 성장할 유인이 없고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 유리하다”며 “기업을 쪼개거나 규모를 늘리지 않는 방향으로 경영 목표가 바뀐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법에도 2조원의 허들이 있는데, 자산이 1조9000억원인 기업은 절대로 규모를 더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자산총액 2조원을 넘는 순간 상법에 따라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각종 규제가 한꺼번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와 김영주 부산대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차등규제 전수조사’에 따르면 국내 경제 관련 12개 법안에만 343개의 차등규제가 존재한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올라서는 순간 94개의 규제가 추가되고,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분류되면 329개로 급증한다. 공정거래법상 ‘자산총액이 국내총생산의 0.5% 이상’(약 11조6000억원)인 상호출자제한집단으로 지정되면 규제는 343개에 이른다. 이날 최 회장은 천장에 닿을 높이의 대형 패널 3장에 정리된 343개 규제를 직접 가리키며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경제에 존재하는 계단식 규제는 성장 정체와 민간 활력 저하의 근본적 원인”이라며 “앞으로는 ‘기업이 작으니까 지원’이 아니라 ‘성장했으니까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 분명히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확률이 낮은 현실도 지적됐다. 정부 통계와 에프앤가이드 분석에 따르면, 2020~2023년 4년간 중소기업의 중견기업 진입률은 평균 0.04%에 불과했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비율은 1.4%에 그쳤다. 최 회장은 “누구도 성장의 시그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 것이 우리 경제 정체의 본질적 이유”라고 말했다.
자유토론에서도 규제 개혁 요구가 이어졌다. 이호준 중견기업연합회(중견련) 상근부회장은 “우리 경제의 현 주소는 성장 사다리가 무너진 상태”라며 “(기업 규모별) 차등지원과 규제가 아니라 성장 친화적·성과 창출형 인센티브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희 삼성전자 CR담당 사장도 “규제 기준을 규모가 아니라 산업별로 전환해야 한다”며 “대기업은 해외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데, 국내 규제는 미국·유럽의 글로벌 테크 기업과는 다른 잣대로 운영된다”고 했다.
정부는 기업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세계 무역 질서가 보호무역주의로 급변하면서 대기업도 비상 상황에 직면했다”며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정부 역량을 총동원하겠다”고 밝혔다. 기업들이 염려하는 ‘노란봉투법’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친노동이 곧 친기업이 될 수 있도록 저성장에 빠진 대한민국을 재도약시키겠다”며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구조적 격차 해소의 첫걸음”이라고 설명했다. 또 “내년 3월 법 시행까지 현장 지원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해 교섭 표준모델을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대한상의,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중견련은 이번에 출범한 기업성장포럼을 정부·국회와 함께 규제 개선 문제를 공유하고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협력 플랫폼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국내 주요 경제단체들이 힘을 모아 우리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규제를 개선하고 민간 성장 동력을 회복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날 행사에는 최 회장과 구 부총리, 김 장관을 비롯해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 이호준 중견련 부회장, 문신학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 권남훈 산업연구원장, 김세완 자본시장연구원장 등 민·관·연 대표 30여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