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삐걱대던 양국 관계를 복원했다. 이날 오후 6시(현지시간)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찬을 겸해 두 시간가량 진행된 양자회담은 2019년 6월 평양회담 이후 약 6년 만에 성사됐다. 회담으로 사흘간의 방중 일정을 마무리한 김 위원장 일행은 이날 밤 10시 베이징역에서 전용열차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동안 소원했던 양국 관계의 복원을 강조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북한은 양국 간 상호 이익이 되는 경제·무역 협력을 가속화해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조하며 ‘안러경중(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과 밀착)’ 전략을 취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또 “북한은 중국과 당과 국가의 각급 인적 교류를 긴밀히 하고, 당 건설과 경제 건설 등 방면에서의 경험을 나눠 북한 당과 국가 건설 사업의 발전에 힘을 보태길 원한다”고도 했다.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북한이 본격적으로 흡수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향후 북·미 대화를 염두에 둔 시 주석은 북한과의 전략적 협력을 다짐했다. 그는 “중국과 북한은 국제 및 지역 문제에서 전략적 협업을 강화하고 공동의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며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은 항상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고수하며, 북한과 협력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던 중국은 이날 공식 회담 결과문에 비핵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2018~2019년 당시 중국 베이징과 다롄, 북한 평양에서 진행한 다섯 차례의 회담에서 모두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했던 것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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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중국과 경제·무역 협력 가속화, 더 많은 성과 원해”
김 위원장은 비핵화 언급을 하지 않은 데 화답하듯 중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북한은 대만·티베트·신장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유엔 등 다자 플랫폼에서 계속 조정해 양측에 공동 이익과 근본 이익을 수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북·중 정상이 나란히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협력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은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이나 북·미 대화 재개 등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도 서로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또 중국이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우회로 역할을 담당해 주길 기대하는 속내도 내비쳤다.
지난해 북·중 양국은 수교 75주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밀수 단속 강화와 김 위원장의 ‘숙적’ 발언까지 전해지면서 우호의 해 폐막식까지 열지 못할 정도로 냉각기를 겪었다. 불편했던 북·중 관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주선으로 66년 만에 북·중·러 정상이 천안문 망루에 함께 오르는 극적인 이벤트로 해빙기를 맞았다.
다만 시 주석이 오는 10월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세 담판을 앞두고 있어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북·중·러 3국 정상회담은 열지 않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앞서 2일 중·러 회담을 마친 푸틴 대통령은 3일 밤 왕이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의 공항 환송을 받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3자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날 시 주석은 김 위원장과 소규모 차담을 나누고 만찬을 함께했다고 중국 측이 발표했다. 다만 소규모 차담에 동행한 딸 김주애의 동석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전날 김주애가 참석하지 않았던 외빈 환영 오찬에 알렉산더 루카셴코(71) 벨라루스 대통령의 3남 니콜라이가 VIP 테이블에 앉은 모습을 중국중앙방송(CC-TV)이 보도했다.
이날 공식 양자회담에는 김병호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조용원·김덕훈 당 중앙위원회 비서, 최선희 외무상, 이용남 주중 대사, 김성남 국제부장이 배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서열 5위 차이치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 왕이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이 배석했다. 북·중 관계를 담당해 온 당 중앙대외연락부 관계자의 참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날 회담까지 김 위원장은 6년 만의 방중 기간 내내 중국 측과 신경전을 펼쳤다. 지난 2일 오후 4시 베이징역에 도착한 뒤 이틀 연속으로 북한대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등 앞선 방중과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전날 천안문 전승절 열병식과 외빈 오찬, 댜오위타이 18호각에서 열린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 외에는 대사관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두문불출했다.
사흘간 특수경찰(SWAT) 차량 수 대가 배치될 정도로 삼엄했던 북한대사관 일대의 경호는 4일 오후 늦게 김 위원장의 차량 행렬이 빠져나가면서 정상으로 돌아갔다. 이날 인공기를 달고 사이드 도어에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징하는 금색 문장을 단 김 위원장의 벤츠 차량 두 대가 오후 4시50분 천안문 방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 중앙일보에 포착됐다. 차량 행렬에는 선물이 실린 것으로 추정되는 탑차 트럭 두 대가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시 주석은 김 위원장과의 만찬을 배려한 듯 북·중 회담을 이날 마지막에 배치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한·미 정상이 대화 의지를 보였는데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일단 중국과의 밀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제 발전에 필요한 지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국을 향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라는 압박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