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양국 간 고위급 왕래와 전략적 의사소통 강화에 대해 논의하며 '북·중 관계' 복원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노동신문은 5일 김정은이 전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소식을 전하면서 이번 중국 방문이 "조중(북·중) 친선관계의 불변성과 불패성을 보여준 역사적인 계기"라고 평가했다.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중조(북·중) 관계를 훌륭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공고히 하며 훌륭하게 발전시킬 용의가 있다"며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여도 이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정은도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조중사이 친선의 감정은 변할 수 없다"고 화답했다. 사실상 전통적인 북·중 혈맹관계의 완전한 복원을 선언한 셈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국 전승절(戰勝節·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대회) 공식 행사에서 시진핑·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서며 국제적인 입지를 다진 김정은이 러시아에 이어 중국까지 뒷배로 챙기며 안보와 경제 쌍두마차를 동시에 견인할 동력을 마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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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묵인 끌어내
관심을 끌었던 '한반도 비핵화' 관련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회담 결과문이나 북한 관영 매체 보도에서 모두 비핵과 관련 언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관련한 내용은 중국 외교부가 내놓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란 시진핑의 발언이 전부였다.
앞서 양 정상이 2018~2019년 당시 중국 베이징과 다롄에서 진행한 4차례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의견 교환과 함께 남북, 북·미 간에 진행했던 비핵화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시진핑과 푸틴이 지난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관력국들에게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강압 조치와 억압 정책"을 포기할 것을 촉구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논의가 빠진 것을 두고 중국이 북한을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기 위해 '한반도 3원칙'을 언급하지 않았거나 수정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반도 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자주적 해결이란 '한반도 3원칙'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3원칙'을 수정해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당분간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한·미의 태도를 보거나 외교적 레버리지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중국센터장은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하면서 중국은 북한이라는 전략적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를 앞세우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 향후 대미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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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활로 모색도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이날 회담에서 김정은은 "북한은 중국과 양당 및 양국의 각 계층 교류를 긴밀히 하고 당 건설과 경제 발전 등의 경험을 교류해 북한의 당과 국가 건설 사업 발전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며 "양국의 상호 이익과 경제 무역 협력을 심화해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군사·안보 분야에서는 러시아, 경제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각각 강화하는 '안러경중(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과 밀착)'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이 이번 방중 수행단에 내각 총리를 역임한 김덕훈 당 경제부장과 김수용 당 재정경리 부장과 같은 경제 담당 간부를 포진시킨 것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경제난에 빠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며 "북한 당국이 중국의 경제 개발 모델을 참고해 경제개발·협력을 더욱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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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에 견제구 날린 北
또 노동신문은 양 정상이 정상회담에서 "고위급 내왕(왕래)과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 나가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이는 다음 달 10일 평양에서 열리는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에 중국의 고위급 인사가 참석할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진핑의 전격적인 방북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한동안 소원했던 북·중 관계의 복원은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끌어내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구상에도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다. 정부는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중,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남북 대화를 풀어간다는 구상이었는데, 북·중·러 대 한·미·일 구도가 부각되면서 한층 복잡해진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신문에 따르면 북·중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국제 및 지역 문제들에서 전략적 협조를 강화하고 공동의 이익을 수호할 데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와 관련해 김정은은 "북한은 앞으로도 국가 주권과 영토완정, 발전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입장과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 성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북·중·러 협력이 한반도를 넘어 대만해협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처음 시사한 발언으로 볼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 힘을 실어주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의 전향적인 변화를 끌기 위해 묵직한 견제구를 날린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