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 확대에 ‘비자 단속’ 리스크(위험)가 변수로 급부상했다. 미국 정부가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을 기습 단속해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을 체포·구금하면서다. 대통령실이 “석방 교섭을 마무리했다”고 밝혔지만 불씨가 남았다.
LG엔솔은 7일 김기수 최고인사책임자(CHO)를 현지에 급파했다. 김 CHO는 출국길에 인천공항에서 “구금된 직원의 조속한 석방이 최우선”이라며 “신속하고 안전한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LG엔솔은 사태 직후 고객사 면담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 미국 출장을 전면 중단했다. 현지 체류 직원에게는 귀국 또는 숙소 대기를 지시했다.
현대차도 추가 단속에 대비해 비상대응팀을 가동했다. 미국 출장은 필수 불가결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류하라고 권고했다. 협력업체까지 고용·비자 검증 절차도 강화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공장을 짓는 SK온과 삼성SDI, 한화오션, LS전선, 효성중공업, CJ푸드빌 등 기업도 비자 발급 상황에 문제가 없는지 긴급 점검에 나섰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이날 “구금자 석방 교섭을 마무리했다”며 “재발과 유사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산업부 및 관련 기업 등과 공조 하에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체류지와 비자 체계를 점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장의 불은 껐지만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체포 사태를 두고 “트럼프의 두 핵심 정책인 ‘불법 이민 단속’과 ‘미국 제조업 재건’이 충돌한 뜻밖의 장소가 됐다”며 “트럼프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해외 기업에 새로운 리스크가 생겼다”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는 예고된 측면이 있다. 트럼프 정부가 관광이나 단기 출장 등을 위해 허용한 전자여행허가(ESTA)를 일부 한국 기업이 ‘90일짜리 취업비자’로 활용한다고 보고 입국 심사를 강화하면서다. 정만석 이민법인 대양 미국 변호사는 “ESTA로 90일간 체류하며 미국에서 일하는 건 엄밀히 말해 편법”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엔 ESTA로 미국에 입국하려던 LG엔솔 기술자가 무더기로 입국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는 이후 “ESTA로 미국에 출장을 갈 경우 2주 안에 돌아오라”는 공지도 했다. 한 2차전지 업체 관계자는 “최근 회사 홍보 동영상을 촬영하러 미국에 나간 직원도 정식 B1(단기 상용) 비자를 발급받도록 했을 정도로 바짝 긴장해왔다”고 말했다.
단속 강화는 미국인 고용을 늘리라는 압박이기도 하다. 문제는 공장 건설이나 초기 가동에 필요한 수준의 기술·전문성을 갖춘 현지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지에 공장을 짓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공장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안정화하는 과정에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한국 기술자를 급히 보내 해결한 적도 있다”며 “하청-재하청 구조 밑단으로 갈수록 비자 관리가 더 허술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한국 근로자가 전문직 취업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단기 상용 비자 (B1) 등을 발급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식으로 B1 비자를 발급 받으려면 최소 100일 이상 걸린다. 협력사는 원청인 대기업보다 비자를 받기 더 어렵다. 주재원 비자 등을 받으려면 원청 기업과 직접 고용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B1 비자 거절 확률은 27.8%에 달했다. 석 달 이상 기다려도 4명 중 1명 이상은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미국에 투자를 늘리라면서 정작 필수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에 깐깐한 트럼프식 양동(陽動) 작전에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무역협회와 국내 기업은 한국인 전문가 비자 쿼터를 연간 1만5000개 신설하는 내용의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신설을 요구해왔다. 호주는 1만500명, 싱가포르는 5400명, 칠레는 1400명의 쿼터를 확보했지만 한국은 아직 전용 취업비자가 없다.
장상식 무협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비자 문제는 기업이 풀 수 없는 문제고 결국 양국 정부 간 협의가 우선”이라며 “미국 정부가 필수 인력에 대한 비자 문제를 풀어야 대미 투자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