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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의 시시각각]비핵화 거부하고 '정상국가' 되겠나

중앙일보

2025.09.07 08:28 2025.09.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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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논설위원
2018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4차 동방경제포럼' 기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낙연 한국 총리 등이 무대에 나란히 앉아 이색적인 공개 토론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러시아 국영TV 유명 앵커인 세르게이 브릴로프가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에게 잇따라 던졌다.
2018년 9월 1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4회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날 푸틴 대통령은 사회자의 질문을 받고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는 취지로 발언해 주목받았다. [사진 러시아 대통령궁]
사회자는 그해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로 갈 때 중국이 시진핑 주석의 전용기인 에어차이나(CA) 여객기를 파격적으로 제공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중국은 비핵화를 위해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할 의향이 있느냐"고 불쑥 질문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시 주석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김정은, 양복 입고 다자외교 데뷔
베이징 정상회의에 비핵화 실종
북한 감싸기 급급 중·러도 무책임
시 주석은 핵우산 제공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한 채 북한의 안보 우려와 비핵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같은 핵우산 질문을 받은 푸틴은 "좋다(영어 통역은 'Why not')"며 긍정적으로 응수했다. 러시아 대통령궁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당시 영어 문답을 보니 푸틴은 "시 주석의 발언에 동의한다"면서 "중국은 핵우산을 갖고 있기에 충분히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나란히 선 모습. 김 위원장의 다자외교 데뷔 무대였다. [노동신문 뉴스1]
지난 3일 베이징에서 열린 80주년 중국 전승절 열병식 행사에 참석한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천안문 성루에서 시 주석 좌우에 나란히 선 모습을 보면서 7년 전 러시아 동방경제포럼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7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놨다. 당시까지만 해도 외교 무대에서 비핵화 해법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이번 베이징 전승절 행사 기간에 비핵화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노딜과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그리고 지난 1월 힘의 논리를 앞세운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제정치 역학구도가 출렁거린 후폭풍이다.
핵을 보유한 유엔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P5)의 일원인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감싸기에 급급한 모습은 무책임하다. 북한이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 전장에 재래식 무기뿐 아니라 군 병력을 파병하면서 북·러가 군사동맹으로 밀착하자 위기감을 느낀 시 주석이 김 위원장을 베이징으로 초대했고, 김 위원장은 이번 방중을 다목적 이벤트로 활용했다. '러-우 전쟁'이 조만간 끝나 러시아의 대북 지원이 급감할 경우에 대비해 중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북한판 '안러경중'이다.
대한민국은 물론 미국·유럽 등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지만, 중·러를 병풍 삼아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계산도 김 위원장이 했을 법하다. 북·미 정상회담이 재차 열릴 경우 비핵화를 건너뛰고 핵 군축 협상으로 직행하려는 포석이다. '극장 국가'인 북한은 천안문을 무대 삼아 4대 세습 후계자로 거론되는 딸 김주애를 외교 행사에 대동함으로써 북한 체제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과시하는 효과도 노렸을 법하다. 김 위원장은 인민복 대신 금색 넥타이에 양복 정장 차림으로 등장해 정상국가임을 강조하려 애썼지만, 국제사회가 반대하는 핵을 손에 쥔 채 정상국가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붉은 원)와 함께 전용 열차 편으로 지난 2일 중국 베이징 역에 도착해 차이치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과 왕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영접을 받고 있다. 조용원 노동당 비서, 최선희 외무상 등이 수행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수뇌부의 기획력을 고려하면 김 위원장은 올해 출범 80주년을 맞은 유엔 총회에 참석하려 할까. 10월 경주 아태경제협력기구(APEC) 회의 기간에 김정은-트럼프 회동 장면도 볼 수 있을까. 올해 41세가 되면서 더 노련해진 김 위원장을 상대하려면 치밀한 전략과 지혜가 필요할 텐데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민주당 의원 입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망언이 쉽게 나오니 참 걱정스럽다.



장세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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