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 확대에 ‘비자 단속’ 리스크(위험)가 변수로 급부상했다. 7일 대통령실이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미 이민당국에 체포·구금된 한국인 300여 명에 대해 “석방 교섭을 마무리했다”고 밝혔지만 불씨가 남았다.
LG엔솔은 7일 김기수 최고인사책임자(CHO)를 현지에 급파했다. 김 CHO는 출국길에 인천공항에서 “신속하고 안전한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구금된 LG엔솔 직원 47명은 내년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장비·전선 등 설비를 구축하기 위한 팀장급 이하 인력이다. 마찬가지로 협력업체 직원 250명도 장비·전선 등 설비 관련 인력이었다고 한다.
LG엔솔은 사태 직후 고객사 면담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 미국 출장을 전면 중단했다. 현대차도 비상대응팀을 가동했다. 미국 출장은 불가피한 경우 외엔 보류하도록 권고하고, 협력업체까지 고용·비자 검증 절차를 강화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공장을 짓는 SK온과 삼성SDI, 한화오션, LS전선, 효성중공업, CJ푸드빌 등 기업도 긴급 점검에 나섰다.
기업들, 미국 출장 긴급 중단·보류 이번 사태는 예고된 측면이 있다. 트럼프 정부가 관광이나 단기 출장 등을 위해 허용한 전자여행허가(ESTA)를 일부 한국 기업이 ‘90일짜리 취업비자’로 활용한다고 보고 입국 심사를 강화하면서다. 지난 6월엔 ESTA로 미국에 입국하려던 LG엔솔 기술자가 무더기로 입국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는 이후 “ESTA로 미국에 출장을 갈 경우 2주 안에 돌아오라”는 공지도 했다. 한 2차전지 업체 관계자는 “최근 회사 홍보 동영상 촬영차 미국에 간 직원도 정식 B1(단기 상용) 비자를 발급받도록 할 정도로 바짝 긴장해 왔다”고 말했다.
단속 강화는 미국인 고용을 늘리라는 압박이다. 문제는 공장 건설이나 초기 가동에 필요한 수준의 기술·전문성을 갖춘 현지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이후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는 2024년 1300억 달러(약 181조원)에 이를 만큼 미국 공장을 늘렸지만, 현지 숙련 인력 부족으로 애를 먹어왔다. 미국에선 용접공 같은 제조업 필수 인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2005년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 준공 이후 20년 동안 시행착오 끝에 자체적으로 인력을 양성해야 했다. 지난해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한화오션도 한국인 50명을 파견해 현지 인력을 교육하고 있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양질의 인력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면 미국 조선업 재건을 돕겠다는 ‘마스가’ 프로젝트도 순탄하게 진행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용 이후 생산성도 한국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기껏 훈련시켜 놨더니 몇 달 만에 공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미국에선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일부 공장에선 고용한 현지인이 마약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트럼프 정부는 글로벌 기업의 공장을 미국으로 유치하면서 현지 인력 양성은 소홀히 한다”며 “결국 한국인들이 이들을 교육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딜로이트는 “2033년까지 미국 제조업에 380만 명이 추가로 필요하지만, 인력 문제 해결 없이는 최대 190만 일자리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최근 10년 새 미국에 지은 배터리·자동차·반도체 등 최신 공장에선 숙련 기술직이 더 중요하다. 단순 노동보다는 복잡한 기계 조작 및 유지·보수를 맡을 기술 인력이 공장 생산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현지에 공장을 짓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공장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안정화하는 과정에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한국 기술자를 급히 보내 해결한 적도 있다”며 “하청-재하청 구조 밑단으로 갈수록 비자 관리가 허술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 신설 최우선 그러나 한국인이 미국 입국 시 전문직 취업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단기 상용 비자(B1) 등을 발급받기는 쉽지 않다. B1 비자 발급엔 최소 100일 이상 걸린다. 협력사는 원청 대기업보다 더 어렵다. 주재원 비자 등을 받으려면 원청 기업과 직접 고용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B1 비자 거절률은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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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달했다. 석 달 이상 기다려도 4명 중 1명 이상은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미국에 투자를 늘리라면서 정작 필수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에 깐깐한 트럼프식 양동(陽動) 작전에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무역협회와 국내 기업들은 한국인 전문가 비자 쿼터를 연간 1만5000개 신설하는 내용의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신설을 요구해 왔다. 호주는 1만500명, 싱가포르는 5400명, 칠레는 1400명의 쿼터를 확보했지만 한국은 아직 전용 취업비자가 없다.
장상식 무협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비자 문제는 기업이 풀 수 없는 문제고 결국 양국 정부 간 협의가 우선”이라며 “미국 정부가 필수 인력에 대한 비자 문제를 풀어야 대미 투자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