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로 여름이 길어지고 더워지면서, 국내 프리미엄 골프장에서 주로 쓰던 한냉지 잔디(켄터키 블루그래스, 벤트그래스 등)는 자리를 잃고 있다. 더위에 약해 여름만 되면 잔디가 상하고 병충해에 시달리며 누더기가 돼 골퍼들을 짜증나게 한다.
지난 6일 찾은 전남 해남 파인비치 골프장의 페어웨이는 전혀 달랐다. 바늘처럼 가는 잎이 촘촘히 자라 카펫을 깔아놓은 듯했다. 마치 마스터스가 열리는 미국 오거스타 내셔널의 잔디를 연상케 했다. 덕분에 코스의 선이 살아났으며 바다 풍경까지 더 빛나 보였다.
캐디 김진 씨는 “잔디 죽은 곳이 없고 코스가 훨씬 아름다워져 손님들이 좋아한다. 일하는 나도 자부심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바닷가 코스인 파인비치는 지난 3월 양잔디를 걷어내고 금잔디로 교체했다.
금잔디는 사실 한국 토종 잔디다. 국어사전에 “잡풀 없이 탐스럽게 자란 잔디”라 정의될 정도로 아름답다. 농학적으로는 세엽조이시아(細葉 Zoysia)라 불린다. 잎이 가늘고 촘촘해 부드러운 질감을 주고, 매끈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줘 주로 관상용에 쓰인다. 밟힘에도 잘 견디고, 잡초 억제력도 뛰어나다. 한국 남부지역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얼추 이 잔디를 기억하고 있다.
심규열 한국잔디연구소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한국 금잔디를 가져가 ‘고라이 시바’(고려 잔디)라 부르며 일본에 널리 퍼뜨렸다. 부산 동래 골프장과 제주의 오라, 아라 골프장이 한때 금잔디를 썼으나 벌레 피해와 관리 문제로 갈아엎은 후 한국 골프장에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상태”라고 말했다.
파인비치 허명호 대표가 금잔디 부활을 꿈꿨다. 단순한 취향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허재현(85)씨는 KPGA 프로로 동래 골프장 경기과장이었다. 허 대표는 동생 허석호 프로와 함께 어린 시절 그곳 금잔디 위에서 뛰어놀았다.
허 대표는 “2012년 미국 텍사스 주의 블루잭 내셔널(타이거 우즈가 처음 설계한 골프장)에 견학 갔다가 잔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릴 때 보던 한국 금잔디가 거기 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리우 올림픽 골프 코스에도 쓰일 거란 얘기를 듣고 금잔디를 한국에서 다시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리우 올림픽과 블루잭에서 쓴 잔디는 정확히는 제온 조이시아(Zeon Zoysia)다. 한국 금잔디(Zoysia Matrella)를 미국에서 가져가 유전적으로 개량한 잔디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제온 조이시아는 미국 등에서 평판이 매우 좋다. 그러나 미국에서 개량한 종이어서 한국에 들여오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허 대표는 해비치 골프장 대표 재직시 금잔디를 심으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파인비치에 부임한 후 4년간 인근 부지에 금잔디를 심어 기후 적응능력을 테스트했다. 일본 투어에서 뛴 동생 허석호는 “일본 남부 골프코스들은 대부분 이 잔디를 쓴다. 최고의 골프장 잔디”라며 적극 추천했다.
금잔디는 까다로운 면도 있다. 잎이 너무 촘촘해 통기 작업이 필요하고 벌레도 많이 낀다. 난지형 잔디라 겨울에 이상 저온이 오래 지속되면 얼어 죽을 위험도 있다.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허 대표는 “우리 잔디를 저 멀리 태국, 베트남, 호주, 필리핀, 브라질에서도 가져가 잘 쓰고 있는데 원산지인 한국에서 안 쓰는 건 말이 안된다”라며 설득했다.
허명호 대표는 “잔디 교체 비용 40억 원이 들었지만, 연간 관리비가 10억 원 절감돼 4년이면 투자금이 회수된다. 여름철 잔디가 죽어 생기는 손님들의 불만과 이에 따른 골프장 평판 저하도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올해 10월, 파인비치에서는 LPGA 투어 BMW 챔피언십이 열린다. 허 대표는 “대회를 앞두고 방문한 LPGA 인스펙션 관계자가 ‘페어웨이, 티잉그라운드, 그린, 러프 등 전 구역에서 잔디 밀도, 볼 라이, 색감 모두 투어 기준에 부합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심규열 잔디연구소 소장은 “조이시아 마트렐라는 버뮤다와 라이그라스를 섞은 오거스타 내셔널 잔디와 질감이 비슷하다”고 했다. 페어웨이가 카펫 같다는 평가를 받는 마스터스만큼 아름답다는 뜻이다.
심 소장은 또 “마스터스에 비해 샷감은 조금 떨어질 수 있지만 한국 남부 고급 골프장에는 최적이며 그런 면에서 한국 금잔디의 부활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라고 평했다.
사우스케이프와 군산CC 등에서도 금잔디 도입을 검토하고 있어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이 예상된다. 이 아름다운 잔디를 수도권 골퍼들도 즐길 수 있을까. 난지 잔디라 중부 지역까지 북상이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허 대표는 “금잔디 육종장이 파주였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경북 고령 오펠 골프장은 금잔디를 개량한 제온 조이시아를 쓴다. 오펠 골프장 민문철 이사는 “잔디가 안정될 때까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내장객들이 ‘페어웨이가 카펫 같다’면서 맨발로 치고 싶어할 정도로 좋아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