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홍윤표 선임기자] 한국 야구계의 큰 별이 졌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 총재직무 대행을 역임했던 '한국프로야구 산파역' 이용일 전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이 9월 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KBO는 고인의 야구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사상 최초로 KBO 장(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고인은 한국프로야구 창설을 기획, 설계하고 터전을 닦았던 큰 인물이었다. 초창기 프로야구는 그의 손에 의해 실행됐고, 상당 부분 그의 의지와 노력으로 제 자리를 잡고 오늘날 10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한국 최고 인기 종목으로 군림하게 됐다.
고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은 한국프로야구 발족(1981년 12월 11일) 이후 9년 동안 사무총장을 맡아 제7, 8 구단 창단,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 성사, 중계권료 도입 등 프로야구 발전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을 입안, 이른바 전두환 정권 실세들의 협조를 얻어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일이다. 그는 그야말로 한국프로야구 ‘산파’ 노릇을 해낸 핵심 인물이었다.
고인은 1981년 8월에 서울 상대 동기인 이호헌(작고) 초대 KBO 사무차장과 의기투합, ‘한국프로야구창립계획’을 수립, 전두환 정권과 긴밀히 협의해 지역연고제를 바탕으로 초대 서종철 총재와 호흡을 맞춰 초창기 한국프로야구를 앞장서 이끌었던 탁월한 행정가이자 수완가였다. 당초 전두환은 정권 안위 차원에서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해 지역연고제를 반대했으나 고인은 이상주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통로로 “고교야구에서 보듯이 운동장 안에서 지역감정이라면 애국심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며 한 달간 끈질긴 설득 끝에 도입을 성사시킨 일화도 유명하다.
1991년부터 1999년까지 4년마다 3차례 열렸던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 역시 고인이 재일교포 장훈의 협조를 얻어 일본 관계자들과 3년 동안 꾸준한 협상을 벌여 ‘올스타 교류전’을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로 인해 선동렬, 이상훈, 이종범 등이 잇달아 일본 프로야구판에 진출, 한국야구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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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 프로야구 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KBO 리그 사상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을까.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1986년 10월 22일 대구에서 열렸던 한국시리즈 3차전 직후에 벌어진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을 꼽는 이들이 많다.
그 사건은, 지역연고제로 출발한 한국프로야구가 맞닥뜨린 ‘지역감정’의 민낯이었다. 그때가 자칫 프로야구 초창기 존립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대구 경기 무용론’ 따위의 강경한 주위의견을 억누르고 슬기롭게 사건을 수습하고 해결에 앞장섰던 이가 바로 고인이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을 마치고 서종철 총재를 숙소로 모셔드린 뒤 구장 사무실로 다시 나가는데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이종남(작고) 기자가 ‘내일 또 어떤 폭동이 일어날 줄 모르는데 서울로 가서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밤 11시가 넘어 숙소에서 안의현 총무부장과 박현식 심판위원장, 김창웅 홍보실장 등과 함께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창웅 홍보실장도 이종남 기자와 같은 소리를 했다.”
이용일 총장은 그런 얘기는 프로야구를 그만두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대구를 떠나면(경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대구에서는 해태와 삼성의 경기를 다시는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 서종철 총재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이용일 총장은 이른 시각에 서종철 총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경북경찰국장이 서 총재의 육군 대령 출신 후배였다. 이 총장이 서 총재와 함께 경북경찰청을 방문, 경찰국장을 만나 “오늘 경기를 안 하고 서울로 가면 그다음부턴 대구에서 해태 경기를 다시는 못하게 된다”며 협조를 요청하자 “경기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라는 답을 들었다. 그해 한국시리즈 4차전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내가 총장을 할 때 제일 신경을 쓴 일이 그 사건이었다. 위기였다기 보다는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국프로야구 초창기, 이용일 당시 사무총장은 직접 나서서 ‘해결사’가 돼야 했다. 그의 확고한 생각은 스포츠에 공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우리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야구판의 자정력과 자체 해결 능력이 부족했고, 외부 입김이 작용할 요소가 그만큼 많았다. 그 시절, 고인이 기민하고 과감하게 대처했기에 ‘격렬한 프로야구판’이 굴러갈 수 있었다.
고인은 1931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되던 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경동중(5년제), 서울 상대를 졸업했다. 경동중 2학년 때 국가대표를 지냈던 매부(유복룡)의 권유로 야구선수(내야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24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던 야구대회 때에는 서울 상대 야구부원으로 참가, 성균관대에 이긴 다음 연세대와의 준결승전을 준비하던 도중 6.25가 터졌다. 그해 10월 입대,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야구단에서 선수로 뛰었고 1956년에 제대했다.
고인은 1957년 전북 군산에 근거를 둔 선친의 가업인 ‘만월표 고무신’ 메이커 경성고무 상무로 취임, 경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군산에 초, 중학교 야구부를 만들었고, 경성고무 대표 시절이었던 1968년에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 창설 디딤돌을 놓았고, 전북야구협회장도 맡아 지원을 아끼지 않아 ‘군산 야구의 대부’로 불렸다.
초창기 해태 타이거즈 주축이었던 김봉연, 김일권, 김성한, 김준환 등 유명 선수들이 모두 그의 보살핌 속에 큰 선수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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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2003년 6월 12일 치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백구(白球)와 함께한 60년(年)’ 연재를 마무리하며 “프로야구는 구단 수입을 늘려 적자 폭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우선 1단계(…), 입장 수입을 늘리려면 전국적으로 3만석 규모의 구장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다. KBO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부 및 지자체와 협력해 과감하게 투자하고(…) 대구, 광주, 대전 구장도 3만석 이상 규모로 확장해야 한다. 그래야 연 관중 5백만 시대가 다시 돌아오고 8백만 시대를 향해 나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과연 그의 뜻대로 광주, 대구, 대전 구장이 새로 지어졌고 관중 1000만 명 시대의 마중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만 해도 고인은 망백(望百)의 고령임에도 비록 세월의 무게감에 짓눌려 어깨가 약간 굽긴 했으나 여전히 승용차를 이용하는 대신 걷기를 고집하면서 지하철로 이동하며 지인들을 만났다. 고인은 2021년 초 사석에서 만나자마자 대뜸 “잘못 생각한 총재들 때문에 도대체 발전이 없어. 프로야구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야. 비즈니스야. 흑자가 나야지. 그러면 각 구단의 전력이 평준화를 이룰 수 있고, 평준화가 되면 관중들이 더욱 흥미를 갖게 돼 구장이 들어찬다”면서 미국의 메이저리그나 NFL 커미셔너의 예를 들며 열변을 토했다.
“아니, 우리는 어떻게 된 게 광주 구장을 2만 5000석으로 만드니까, 다른 데도 다 따라 합니까. 4만 5000석도 있어야지. 그걸 설득하는 게 커미셔너의 일이야. 커미셔너는 군림하지 말고 앞장서서 일해야지”
‘스포츠 비즈니스와 흑자 구단’은 고인이 틈날 때마다 프로야구계에 던진 지론이자 화두였다. 이제 그의 염원인 ‘프로야구 산업화’가 비로소 실현 단계에 접어든 이제, 고인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고인이 평화로운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시길 빈다.
고인은 슬하에 아들(승규. 일본 SK플래닛 대표), 딸 금희, 지현 씨를 두었고, 빈소는 서울대병원장례식장(2호실.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1) 02-2072-2091, 발인은 2025년 9월 10일(수) 오전 8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동두천예래원)이다.
사진/(위)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의 모습
(중간) 고인(오른쪽)이 어느날 광주구장에서 서종철 초대 KBO 총재와 함께 한 모습. (왼쪽은 고 임채준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