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재촉하는 새벽녘 장대비가 폭염을 다 삼켜버릴 듯 내렸다. 먼동이 트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환한 햇살이 눈 부시다. 지난해 만든 연못에 늦은 연꽃이 활짝 피었다. 숲속 나무들의 표정이 경쟁하듯 반짝인다. 이를 바라보는 이의 입가엔 행복을 듬뿍 머금은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모두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폭염과 폭우 속에서 살아남은 게 고맙고 대견하다. 산중에 깃들어 석 달 동안 용맹정진으로 더위를 이겨내고 하안거를 마친 스님네 표정들도 하나같이 해맑다. 진흙이 있어 연꽃도 피어나듯이 어려움을 이겨낸 순간들이 오늘의 맑고 밝음을 만든 것이다.
고통은 지혜 키우는 연꽃의 진흙
번뇌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길
어떤 지혜의 꽃 피울까 자문하길
고통스러운 현실과 평화로운 이상은 이렇듯 언제나 어우러져 존재한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나 불안·슬픔과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나쁜 것’으로, 평화와 기쁨·안정을 ‘좋은 것’으로 규정하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그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어려움들은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외려 지혜와 평화를 피워 낼 수 있는 자양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안성의 수행처 참선마을을 처음 찾아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호기심이나 관심 때문이 아니라 각자 처한 어려움에 대해 상담하기를 원한다. 많은 이들이 이곳 수행처에서 선명상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 더 나은 삶으로 이끌 큰 지혜를 얻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짐짓 보람도 느낀다.
『유마경』에 ‘더러움과 깨끗함은 둘이 아니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라는 저 유명한 중도법문(中道法問)이 있다. 이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응용한다면 호흡의 들숨과 날숨, 소음과 침묵, 번뇌와 평온,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원리일 것이다. 사회정치적 갈등 구조인 진보와 보수, 우리와 그들, 일(고통)과 삶(행복), 성공과 실패, 인간과 자연이 모두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이다. 이분법적 틀을 벗어 버리고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진리를 경험하게 되면, 홀연히 세상은 행복과 감사로 가득함을 깨닫게 된다.
육조 혜능대사는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라고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얼음(번뇌)과 물(보리)의 원리이다. 본질은 같지만 조건에 따라 형태만 다르다는 가르침이다. 이 둘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힘이 얼음을 녹여 물로 만드는 열(熱)이듯, 선명상이 번뇌를 깨달음으로 전환시킨다.
마조선사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그저 더럽히지만 말라”는 가르침을 폈다.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평상심이 도’라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면 안 되는데…”라고 자책하거나 “이 화를 빨리 없애야지!”라고 억누르는 것이 ‘더럽힘’이다. 그저 화가 치밀면 ‘화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화를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품으면 화두가 되고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불완전한 삶 속에서 매 순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시하고 공부도 되는 좋은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역대 선지식들이 치열한 수행을 통해 밝혀 놓은 길이 있다.
우선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는 수행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준비가 끝나면, 제일 먼저 모든 어려움이 바로 나의 연꽃을 피워 낼 진흙이라고 상상한다. 이 진흙이 없으면 지혜와 자비의 꽃이 자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곧 나의 마음은 진흙을 밀어내거나 싫어하는 대신에 그 어려움들을 부드럽게 허용하는 쪽으로 바뀐다.
두 번째는 이 모든 진흙(생각, 감정, 감각)을 알아차리고 있는 ‘의식의 공간’을 느껴본다. 생각은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앎’ 자체는 고요하다. 가슴은 답답하지만, 그 답답함을 담고 있는 마음은 넓고도 평화롭다.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이 바로 진흙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맑고 밝은 참 마음(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세 번째는 시끄러운 생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지금 이 순간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체험한다.
마지막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압박감을 느끼거나 인간적 갈등을 겪을 때, 그것을 없애려 발버둥 치는 대신에 “아, 지금 내 마음이라는 연못에 진흙이 가득하구나! 이 속에서 어떤 지혜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바꿔본다.
온갖 어려움이 스승이 되는 순간이다. 마치 진흙이 있어 연꽃이 피듯 마음의 평화와 행복한 삶의 길이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