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정부도 사실 알고도 애써 모른 척해 온 거죠. 폭탄 돌리기 하다가 이번에 ‘운 나쁘게’ 터진 거고요.”
한 대미 투자 기업인은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체포·구금된 사태를 두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전문직 비자 발급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상용비자(B1)에 의존해 ‘편법 출장’을 이어온 관행이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간 미국 비자 제도 개편을 위해 노력했지만 ‘안 됐다’고 항변한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있긴 했다. 칠레와 싱가포르는 2004년 자유무역 분위기를 타고 특별비자 쿼터를 얻어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한국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정부 차원에서 550만 달러(약 76억원)의 로비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
하지만 했어야 하는 일을 ‘못 했다’는 비판도 피할 순 없다. 2020년 SK온 조지아 공장에서 ESTA로 미국에 입국했던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체포된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특히 올해 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업계에선 ESTA 비자 소지자의 입국이 거부당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최근 정부 공백이 장기화했고 새 정부 출범 직후엔 관세 대응이 시급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손에 쥐고 방치했던 것도 사실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 정부나 의회의 무관심한 태도와는 별개로, 그간 한국 정부가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지 못해 온 점은 아쉽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이 자성해야 할 측면도 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잡혀간 이들은 대체로 협력업체 근로자였다. 필수 인력이라면서도 정작 신상과 직결되는 비자 문제는 협력업체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제대로 된 법무팀 하나 갖추지 못한 중소 협력업체는 문제가 생겨도 사실상 근로자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협력업체와 동반 진출이 필수적인 구조라면 하청 계약 단계에서부터 비자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고 가야 한다”고 짚었다.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미 조선업 협력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민·관 원팀’을 강조해온 정부엔 기업들이 미국에서 안전하게 사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의무가 있다. 미국에 진출한 한 기업 관계자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는데, 한국 기업을 체포하고 옥죈다면 향후 투자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대미 투자에 걸맞게 전문직 비자 신설은 물론 패스트트랙(신속발급) 등을 제대로 요구해야 한다. 눈 뜨고 뒤통수 맞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