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장혜수의 시선] 오심에 망가지는 것들

중앙일보

2025.09.09 08:18 2025.09.09 13:27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장혜수 스포츠부장
1988년 10월 2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이 열렸다. 미국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3라운드가 끝난 뒤, 주심은 한국 박시헌의 팔을 들어 올렸다. 5명의 심판 중 3명이 박시헌의 우세를 판정하면서 금메달은 그의 몫이 됐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유가 아니었어도, 자신이 진 경기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박시헌 본인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챔피언은 체육관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태극기를 응시했다. 그러나 마음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박시헌의 긴 고통은 그렇게 시작됐다.

금메달 따고 죄인으로 산 박시헌
일본 이기고 비난 직면 여자배구
오심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선수

많은 이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던 이 경기가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2025년 9월 4일,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 하나가 계기가 됐다. 영상이 촬영된 시점은 2년 전인 2023년 5월 30일이다. 한 동양인 중년 남자가 미국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의 한 체육관 링 위에 올라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박시헌이다. 잠시 후, 흑인 중년 남자가 체육관에 들어선다. 존스다. 말을 잇지 못하던 박시헌은 주머니에서 꺼낸 금메달을 존스에게 건넨다. “36년 전 내 홈에서 이 메달을 내가 가져갔다. 그게 잘못된 것을 알고 이제는 당신 홈에서 이 메달을 당신에게 돌려준다.” 평생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는 박시헌의 고백이다. 존스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을 잇지 못한다.

결승전 당시 23살이던 박시헌도, 19살이던 존스도, 이마에는 어느덧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깊게 주름이 파여 있다. 메달 색깔의 주인이 뒤바뀐 건, 링 위에서 서로에게 주먹을 날렸던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복싱협회(AIBA)는 끝까지 “오심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1996년, 영국의 탐사 전문기자 앤드루 제닝스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문서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냉전 시대의 막바지였던 그 당시 동독이 올림픽 메달 순위 경쟁에서 미국을 이기기 위해 기획한 일이라는 것이다.

박시헌이 존스를 찾아가기 석 달 전인 2023년 2월 22일 영화 ‘카운트’가 개봉했다. 영화화 과정에서 실제보다 극적으로 각색된 부분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박시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고교 체육 교사 박시헌은 오심으로 딴 올림픽 금메달의 멍에에 짓눌려 평생 숨죽인 채 살아간다. 자신처럼 오심의 피해로 복싱을 그만뒀던 제자와 함께 복싱부를 재건하고, 그 제자를 챔피언으로 키워내는 이야기다. 박시헌과 가족이 견뎌야 했던 영화 속 고통의 무게에, 보는 이마저 짓눌리는 기분이다. 개봉 무렵 박시헌은 한 인터뷰에서 “자녀들이 청소년 시절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싶어 (영화 제작 제안을) 거절했고 성인이 된 후 수락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박시헌은 올림픽 직후 은퇴해 체육 교사를 거쳐 복싱 지도자 길을 걸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불명예스러웠고, 내 손으로 진정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키워내고 싶어서”라는 게 이유였다.

지난달 코리아 인비테이셔널 진주 국제여자배구대회가 열렸다. 6개 나라가 참가해 풀리그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승4패를 기록했다. 유일한 승리는 한일전이다. 한국은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이겼다. 광복절 다음 날(16일) 열린 이 경기는 역대 150번째 한일전이었다. 2020 도쿄올림픽 예선 4차전 이후 약 4년 만에 일본에 거둔 승리였다. 이런 경우 대개 ‘짜릿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데, 이날 경기에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5세트 결정적 순간마다 심판 휘슬은 한국에 유리한 쪽으로 울렸다. 아웃 판정된 일본의 서브, 보이지 않았던 일본의 터치네트와 오버네트 범실, 그리고 묵살된 일본의 항의. 결국 남은 건 오심으로 얼룩진 승리였다.

대회에 참가한 일본팀은 주전 선수가 대거 빠진 1.5군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이기고도 웃지 못했다. 선수들의 투혼은 오심으로 인해 오히려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팬들은 “편파 판정에 따른 부끄러운 승리”라며 들끓었다. “해당 경기 심판을 징계해달라”는 신고가 스포츠윤리센터에 접수됐고, 센터는 조사에 착수했다. 선수들 잘못이라면, 36년 전 존스를 상대했던 박시헌이 그랬듯, 투혼을 불사르고도 현격한 실력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것뿐이다. 선수들이 오심에 따른 비난마저 대신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36년 전의 복싱장과 오늘의 배구장이 맞대고 찍어낸 데칼코마니 같다.

오심에 망가지는 건 경기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도 그렇다.





장혜수([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