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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18조 지키려 488조원 주나…차라리 25% 관세가 낫다"

중앙일보

2025.09.13 23:21 2025.09.1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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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세 협상의 세부 협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인천공항에 도착해 방미 성과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워싱턴에서 육로로 4시간여 이동해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나눈 협상의 결과가 ‘빈손’이라는 의미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스1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당국자들 사이에선 “지난 4일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방식의 협정에 서명한 이후 미국의 압박 수위가 달라졌다”며 “‘국익에 반하는 합의는 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입장까지 나오면서 협상의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일, 트럼프 조건 수용하면 어리석다”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선임경제학자 딘 베이커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과 일본이 약속한 대미 투자 방식과 관련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설명한 방식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면, 한·일이 합의를 수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jung.suekyoung@joins.com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부과한 25%의 상호관세와 자동차에 대한 25%의 품목관세를 15%로 낮추는 조건으로 각각 3500억 달러(약 488조원)과 5500억 달러(약 767조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은 지난 4일(현지시간) 일본과는 ▶투자 대상은 미국이 정하고 ▶일본은 45일 내에 투자금을 보낸 뒤 ▶투자금 회수까지는 미·일이 50대 50, 회수 후엔 미국이 90을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쳤다. 반면 한국과의 협상은 난항을 거듭고 있다.

미국을 방문해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日, 무슨 생각과 계산으로 합의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으로부터 ‘백기 투항’을 받아낸 미국은 한국에도 사실상 같은 조건의 합의문 서명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일본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쁜 선례가 될 합의에 서명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일본과의 합의 이후 미국은 한국과 의견을 좁혀왔던 분야까지 사실상 제로 베이스로 놓고 일본과 유사한 합의를 강요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7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 표명을 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이시바 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마무리한 뒤 사임을 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는 “미·일의 합의에는 투자 대상 선정시 ‘협의’ 규정이 있지만, 미국이 사업성이 전혀 없는 투자처를 정해 일방 통보하는 것 역시 협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러트닉 장관이 예로 든 알래스카 LNG 사업 역시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며 “만약 사업에 실패하면 일본은 투자금 전액을 잃게 되고, 성공하더라도 회수에만 수십년이 소요되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마친 직후인 지난 7일 “관세 협상에 한고비가 지난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25억 달러 지키려고 3500억 주는 구조”


반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회견에서 “협상 표면에 드러난 건 거칠고 과격하고 과하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라며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고,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합의에)사인 못 했다고 비난하진 말아달라”며 장기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결단의 책상'에 앉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스1

협상팀 관계자는 “투자액 3500억 달러 중 1500억 달러를 조선에 특정해 미국의 자의적 결정을 최소화하려던 논의도 이미 ‘희망사항’이 된 상태”라며 “외환보유고가 4113억 달러에 불과한 한국의 입장에서 3500억 달러를 사실상 현금으로 넣으라는 요구를 수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동차에 대한 25% 품목관세를 부담하는 편이 낫다는 내부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CEPR의 베이커 역시 “미국이 15%로 낮춘 상호관세를 25%로 올리면 한국의 대미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의 0.7%인 125억 달러 감소할 수 있다”며 “왜 125억 달러어치를 지키려고 3500억 달러를 줘야 하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요구한 3500억 달러의 20분의 1(175억 달러)을 피해 기업과 노동자를 지원하는 데 쓰는 게 더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美 요구대로 하면 ‘선거용 살포’에도 무방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전용 헬기인 마린 원에 탑승한 모습. 트럼프 대통령은 주말을 보내기 위해 뉴저지의 베드민스터 골프 리조트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외교소식통은 이와 관련 “이론적으로는 일본과 유사한 방식의 합의가 이뤄질 경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을 앞두고 각 주(州)에 선거용 ‘선심성 사업’에 돈을 요구하더라도 무방비가 된다”며 “가령 지방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는 데 투자금이 투여될 경우 투자금 회수 가능성은 ‘제로’로 수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각에선 일본이 ‘백지 수표’를 건네는 방식의 협상에 합의한 배경에 대해 “핵심인 자동차 품목 관세를 포함한 전체 관세를 낮춰 시간을 벌 의도”란 관측도 나온다. 일단 자동차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는 한국보다 유리한 관세로 수익을 극대화 한 뒤에 향후 불합리한 요구가 나올 경우 투자 리스크와 보복성 관세 인상 사이에서 손익을 계산한 판단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에서 EU와의 무역협상에 합의한 뒤 손에 쥐고 있는 문서가 카메라에 잡혔다. 일본과의 협상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수정한 흔적이 남았다. 에너지 구입 비용으로 EU가 제안한 6000억 달러는 7500억 달러로, EU 기업 의 추가 투자 규모는 당초 5000억 달러에서 6000억 달러로 늘었다. AP=연합뉴스

또 유럽 민간기업의 자발적 결정으로 이뤄진 6000억 달러(약 836조원)의 신규투자 방식의 대미 투자를 하기로 한 유럽연합(EU)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외교 소식통은 “유럽은 상대적으로 합리적 투자 형식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핵심 산업인 농·축산물 시장을 사실상 완전히 개방했다”며 “쌀과 쇠고기 등 식품 안보와 관련해 극도로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은 유럽과 달리 대미 협상에서 꺼낼 카드가 상대적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강태화([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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