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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시각각] 박명수의 도발, 그리고 OECD 타령

중앙일보

2025.09.16 08:28 2025.09.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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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박명수가 지난 12일 본인 라디오 방송에서 이재명 정부가 OECD 평균에 맞춰 도입을 추진중인 주 4.5일제와 관련해 우려를 표해 온라인상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유튜브 캡처]
개그맨 박명수가 묵직한 도발을 했다. 지난 12일 본인 라디오 방송에서 주 4.5일제와 관련해 "인구도 없는데 일까지 줄이면 어떡하냐, (주 5.5일제) 당시엔 힘들었지만 열심히 살았기에 이런 (잘 사는) 세상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며 근로시간 감축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당시 "우리나라 평균 노동시간을 2030년까지 OECD 평균 이하로 단축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지난 7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선 "우리가 OECD 평균 대비 120시간 이상 더 일한다"며 이번에도 OECD 통계를 앞세워 노동시간 단축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 센 사람"(12일 타운홀 미팅 대통령 발언)이 강한 의지로 추진하는 정책을 개그맨이 생방송에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탓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맞는 말"이라는 옹호가 있는가 하면 "연예인이라 직장인 고충을 모른다"는 비판도 나왔다.

"인구 없는데 일까지 줄이면" 우려
유럽과 한국 위상 과거와 다른데
여전한 OECD 추종 경쟁력만 저해"
이 대통령 언급대로 한국 근로자 노동시간이 OECD 평균을 웃도는 건 사실이고, 다양한 찬반 의견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논쟁을 지켜보면서 난 좀 다른 의구심이 생겼다. 왜 한국이 쇠락해가는 유럽 중심의 OECD(38개 회원국 중 유럽이 27개국, 부상하는 중국·대만·싱가포르·UAE 등은 비회원국) 평균을 무조건 좇아야 하지, 라는 근본적 의문 말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원로 경제학자인 이현재(96)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경제포럼에 게재한 '한국의 경제학과 경제학자:반성과 제언'에서 "우리는 인구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남한 땅에 몇 명 사는 게 적당한 것인지 답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게 한국 경제학계의 실상"이라고 썼다. 비판 없이 특정 기준을 수용한 후 검증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태도를 질타한 것인데, 내 눈엔 OECD 통계를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비단 위에 언급한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한국이 지난 1996년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한 이후 OECD 통계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기준점이자 지향점이었다. 특히 정권 차원에서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거나 거꾸로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OECD 통계를 전가의 보도처럼 끌어다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엔 선진국 콤플렉스로 OECD만 들이대면 고개 숙이는 우리 국민 태도도 한몫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일 국무회의 도중 산업재해와 관련해 OECD 통계를 언급하며 윤호중 행안부 장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 대통령은 OECD 통계를 자주 인용한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취임 100일을 갓 넘긴 이재명 정부에서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산업재해를 비롯해 국가 부채 비율, 식료품 물가에 이르기까지 이해 당사자의 입장이 엇갈리는 와중에 어느 일방에 규제를 가하거나 상대 진영의 비판을 제압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OECD 통계를 끌어다 쓰고 있다. "20년 넘게 OECD 1위 오명"이라는 자살률처럼 꼭 참고해야 할 지표도 있지만, 경제 구조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인용도 많다.

문제는 이런 무비판적 OECD 추종이 엉터리 정책(대책)으로 이어져 국가 발전은 물론 국민 개개인 삶의 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 윤석열 정부의 의료 정책 아닐까 싶다. 윤 전 대통령은 무리한 의대 증원을 강행하면서 OECD 통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총선 직전인 지난해 4월 대국민 담화에선 "우리나라 의사 수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상당 부분을 OECD 통계에 할애했다. 그 결과? 당시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회수나 당일 진료 가능한 비율 등 의료 접근성 면에서 세계 1위였던 한국 의료 수준은 점차 의료비 높고 접근성 떨어지는 OECD 평균에 수렴해갈 판이다.
지난해 4월 서울 한 대학병원 의사가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의료개혁 관련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는 모습. 윤 전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OECD 통계를 인용하며 의료개혁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그 결과 한국보다 의료 경쟁력 떨어지는 OECD 수준에 수렴하는 개악이 이뤄졌다. [뉴스1]
다른 분야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FT가 OECD 통계를 활용해 쓴 기사를 봤더니, 프랑스 연금 소득자 수령액이 근로자 평균 소득을 넘어섰다. 이래선 국가 존속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놀며 복지 혜택 누려온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정부의 공휴일 축소조차 못 받아들여 거리로 뛰쳐나온다. 다른 유럽 국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드디어 선진국 됐다"며 이른 축배를 들었던 1996년과 달리 이제 유럽은 우리가 무턱대고 추종할 모델이 아니다. 많은 분야에서 오히려 유럽이 우리를 우러러본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OECD 타령하며 모든 기준을 거기에 맞출 건지, 참 답답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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