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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민주당적 민주주의’를 꿈꾸는가

중앙일보

2025.09.17 08:28 2025.09.1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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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논설주간
의회 권력이 우선인가, 사법 권력이 우선인가. 숱한 정치학자들의 고민이다. 권력 간 충돌은 민주주의의 시험대다. 미국 정치학의 거장 로버트 달도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는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서 묻는다. “만약 민주 정부의 입법 기구가 어떤 법률을 적법하게 통과시켰다면, 왜 판사들이 그 법안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져야 하는가?” 국민이 뽑은 의원들의 다수결을 선출되지 않은 판사 몇 명이 뒤집는 게 정당한가. 연방 대법원 판사 9명 중 5명이 미국인들의 삶과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는 게 온당한가. 그의 결론은 다소 애매하다. “대법원은 민주적인 정치체제의 존립에 필요한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률과 행정명령을 무효화하는 권한도 가져야 한다.”

권력 서열 명쾌히 나누려는 충동
민주주의 모순·불편 못참는 태도
정치적 목적 앞세운 특별재판부
필요한 건 예외 아닌 평범한 절차
로버트 앨런 달 미국 예일대 스털링 명예교수. 중앙포토

달이 생각하기에 미국 헌법은 본질에서 모순적이다. 인간 평등이라는 철학을 깔면서도 노예제를 금지하지 않았다. 상원은 인구와 무관하게 주마다 두 석을 배정해 대표성을 왜곡했다.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선출은 종종 전체 민심과 다른 결과를 낳았다. 모두 헌법 제정 당시의 시대적 조건이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달은 미국 헌법을 ‘민주주의의 완전한 모델’이 아니라 ‘비민주적 타협의 흔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달은 모순을 안고도 헌정 질서가 작동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권력 서열은 국민·국민주권, 직접선출 권력, 간접선출 권력 순”(이재명 대통령), “대법원장이 그리도 대단하냐, 대통령 위에 있느냐”(정청래 민주당 대표). 이 말의 공통점은 권력 서열의 모호함을 용인할 수 없다는 태도다. 권력 간 긴장과 견제는 민주주의의 본질인데, 이를 ‘질서 위반’으로 치부해버린다.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걱정스럽다.

민주주의가 권력의 서열대로 작동한다면 선출 권력인 윤석열 대통령의 폭주를 임명 권력인 헌법재판소가 재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 서열의 애매함 혹은 모순을 참지 못하는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생생한 사례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서 봤다. 그의 비상계엄은 대통령과 국회라는 두 선출 권력 간의 갈등을 일거에 해결하려는 충동의 산물이었다. 검찰 조직에 체질화한 명령-복종의 서열 문화가 정치적 미숙성과 결합한 결과였다. 민주주의의 모순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가 파국을 불렀다.

여당이 추진하는 내란사건 특별재판부 설치 시도도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법 절차까지 건너뛸 수 있다는 발상이다. “판사가 모두 법원 소속이니 위헌이 아니다”는 주장은 겉논리일 뿐이다. ‘특별재판부’라는 말이 욕을 먹자 ‘전담재판부’로 포장지를 갈았지만, 본질은 정치의 사법 개입이다. 민주주의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은 독재일 뿐이라는 말은 윤 정권에만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법의 권위와 신뢰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나온다. 바이마르와 나치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법학자 한스 켈젠은 법의 권위를 규범과 절차의 보편성에서 찾았다. 반대로 동시대의 카를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 상황에서 결단한다”고 했다. 슈미트의 사상은 나치의 이론적 무기가 됐고, 켈젠은 나치 박해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윤석열 정권의 계엄 발상은 슈미트식 논리와 닿아 있다. 특별재판부 구상도 슈미트의 결단주의를 연상케 한다. 정치적 필요를 앞세워 예외적 재판을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내란사건 특별재판부 구성을 주제로 열린 긴급 공청회 '특별재판부, 위헌인가?'에 진보성향 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우리 현대사에서 ‘특별’ ‘비상’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는 대개 억압의 다른 이름이었다. 유신 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독재의 가면이었고, 비상군법회의는 민주화 인사를 짓눌렀다. 지금을 군사정권과 견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절차의 보편성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문다. 입법·행정 권력이 다수의 지지를 업고 폭주할 때, 사법이라는 제동 장치마저 무력화한다면 민주주의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여당이 바라는 것이 ‘민주당적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 형태다. 지금까지 시도된 다른 모든 형태를 제외한다면.” 처칠의 말이다. 냉소 같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 모순과 결함으로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힘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우는 데서가 아니라 감내하고 끌어안는 데서 나온다. 불편하고 번거로운 절차가 민주주의를 지탱한다.

인간은 내면의 모순을 인정하고 품을 때 비로소 통합적 인격이 완성된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모순, 불편함, 번거로움을 포용하는 인내가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한다. 필요한 것은 특별재판부가 아니라 평범한 절차다. 무작위 배당, 법관 독립, 보편적 적용. 이 평범함이 민주주의의 숨줄이다. 민주주의는 모순이다. 그 모순을 삼켜내야 민주주의는 살아남는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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