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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선 교자상 혼자서 못 든다…상다리 휘어지는 '백반 벨트'

중앙일보

2025.09.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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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영 백끼① 남도 밥상
글 잘 쓰는 요리사 박찬일이 '강해영 백끼'와 동행한다. 전남 강진의 한정식집 '예향'에서. 손민호 기자
강해영.
전남 강진·해남·영암 세 고장의 첫 글자를 딴 공동 관광브랜드다. 지방 소멸 위기 대응을 위해 세 고장이 뭉쳤다는 점에서 강해영은 의미 있는 시도다. 그 강해영과 week&이 손을 잡았다. 강해영과 week&의 합작 프로젝트 제목은 ‘강해영 백끼’. 세 개 고장의 대표 식당 100곳을 소개하는 초대형 기획이다.

week&은 ‘강해영 백끼’를 위해 올 초부터 세 개 고장의 문화관광재단과 함께 100개 식당을 엄선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를 오늘부터 10개월에 걸쳐 차례로 소개한다. 강해영 백끼 첫 회 주인공은 ‘남도 밥상’이다. 한국인의 음식은 뜨스운 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글 잘 쓰는 요리사 박찬일이 남도 밥상의 내력과 미덕을 짚었다.

박찬일의 남도 밥상 예찬
남도 밥상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사진은 전남 해남 식당 '도화지'의 보리굴비 정식. 손민호 기자
강해영은 ‘백반 벨트’다. 백반은 누가 뭐래도 한식의 압축적인 형태다. ‘백반=한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백반은 장과 젓갈, 국과 나물로 이루어진 기초적인 밥상부터 산해진미가 다 나오는 ‘百飯(100가지 찬)’으로 확장해도 된다. 그런 그림은 이 땅에서 자주 본다.

백반은 ‘상다리가 휘어지게’라는 인심과 욕망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이 상상하는 밥상에 대한 욕망의 최대치를 의미한다. 우리 백반은 더 많이 진설(陳設)하고 더 높게 쌓는 과시형 제사상과 궤를 같이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백반은 우리 음식의 여러 면모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한국인의 밥상은 무엇보다 밥이 맛있어야 한다. 남도 밥상은 밥이 제일 맛있다. 현지의 좋은 쌀로 갓 지은 밥을 내놓기 때문이다. 손민호 기자
백반(白飯)은 흰 밥에서 출발한다. 밥과 반찬으로 이루어지는 식사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표준이고 전통적인 음식인데, 한국에서는 백반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호남의 밥상에서 더 정교하게 발달하면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음식문화가 되었다.

곡창지대라는 호남의 조건이 백반의 힘을 마련했다. 백반은 쌀이 권력이고 화폐였던 시대의 유산이다. 쌀로 밥을 짓고, 그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어물과 고기가 상에 올랐다. 지금 강해영의 밥상은 뚜렷하게 그런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이 지역으로 가면서 미식을 생각할 때 첫손가락으로 꼽는 것이 바로 백반, 남도 밥상이 아닌가.

호남은 생태적으로 조차가 큰 서해안과 물이 깊은 남해안을 끼고 있다. 여러 강이 흘러드는 서해안은 퇴적물과 유기물이 많아 맛있는 어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남해안의 깊은 바다는 고깃배가 드나들기 좋아서 풍부한 어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서해안이 주는 젓갈은 남도 밥상에서 고정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찬의 양념이 되어 더 ‘개미진(‘맛있다’는 뜻의 남도 사투리)’ 맛을 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해남의 전통음식교육농장 ‘해남에 다녀왔습니다’에서. 전통 장 명인 이승희씨가 박찬일 셰프에게 자신이 담근 장을 보여주고 있다. 손민호 기자
이런 자연조건은 물산이 풍부하게끔 했고 돈이 돌게 했다. 풍성한 밥상은 접대문화의 발달로 이어졌고, 나아가 한정식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해지는 원인이 됐다. 두 사람이 들고 들어오는 교자상의 퍼포먼스도 호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상에 비닐을 까는 관습(격조 있다고는 할 수 없다)은 호남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밥상을 내고 치우는 행위의 효율을 고려한 것이다. 백반이며 한정식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동네다운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더 많이, 더 화려하게 내려는 경쟁이 벌어지는 무대가 바로 강해영인 셈이다.

강해영의 한정식(이 용어는 근본이 희미하지만 일단 쓸 수밖에 없다)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철마다 시장을 봐 나오는 ‘아짐’의 즉흥적인 손맛에서 벗어나 점차 주방의 계획에 맞추는 효율 중심의 차림이 되고 있다. 제철보다 표준적 식단이 고려된다. 보리굴비·떡갈비·간장게장 같은 고급 일품요리로 가격을 나누며, 밥상의 바탕을 이루는 찬도 절제하고 있다. 젓갈도 이제는 토하젓 같은 별미 외에는 상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저염 식사가 늘고 백반의 기본인 ‘쌀밥’의 양이 적어지면서 수저질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때문에 메인 요리에 더 힘을 주는 상을 구성하게 됐다.
영암의 백반집 ‘대양회관’은 백반에 반찬이 21개나 나온다. 2인 2만8000원짜리 밥상이다. 손민호 기자
영암의 맛있는 밥집에서 두 아짐이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컬러였지만, 그것이 화석 같은 흑백사진처럼 보였다면 과장일까. 우리가 취재한 강해영의 식당은 여전히 ‘아짐’의 힘이 살아 있지만, 이처럼 변화하는 백반의 시대 변화에 밀려 전설이 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당장 가서 먹는 당신이 승리자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그중에서도 호남은 밥집과 백반의 나라다. 그것을 확인하는 취재였다. 밥술을 뜨는 시간을 중앙일보와 함께하면서 마음이 먹먹했다.
강해영 백끼 남도 밥상 3곳
'예향'의 한정식 상차림. 왼쪽 모퉁이에 있는 음식이 수수떡이다. 매일 손수 만든단다. 손민호 기자
강진 ‘예향’ 한정식의 고장 강진의 대표 한정식집. 강진 한정식의 대가 ‘명동식당’을 맨 처음 연 김정훈(71)씨가 2009년 새로 차렸다. 현재 대표는 딸 정혜영(47)씨다. 옛날보다 음식 수가 많이 줄었다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토하젓·육전·떡갈비·보리굴비·홍어회 등 남도 밥상의 간판 메뉴만 엄선했다. 진수성찬 중에서 어머니가 추천한 음식은 의외로 수수떡이다. 여전히 손수 만든단다. 수라상 4인 20만원.
해남 보리굴비집 '도화지'의 대표 이숙경(57)씨. 화가이기도 하다. 손민호 기자
해남 ‘도화지’ 해남군청 근처의 밥집. ‘보리굴비 정식’ 전문이라고 써 붙였으나 남도 한정식집에 가깝다. 육전에 육회도 나오고, 창란젓·박무침 등 딸려 나오는 반찬도 간단치 않다. 해남 배추로 담근 묵은김치에 살짝 삭힌 홍어회가 함께 나오고, 곁에 갓 담근 겉절이가 놓인다. 김치 두 가지만으로도 공깃밥 한 그릇이 뚝딱 해결된다. 해남산 ‘곱창김’으로 부친 김전이 별미다. 보리굴비 정식 1인 4만원.
영암 '대양회관' 주인 김선자(59·왼쪽)씨와 30년 넘게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홍경열(65) 여사. 손민호 기자
영암 ‘대양회관’ 월출산 큰골 어귀의 백반집. 1994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매운탕을 끓이다가 2년쯤 뒤에 백반집으로 바꿨다. 월출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쌀로 밥을 짓는다. 2인 2만8000원 밥상에 반찬이 21개나 올라온다. 돼지 목살로 만든 제육볶음이 대표 메뉴.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다. 하루에 상을 400번 차린 적도 있단다. 밥을 두 그릇 먹었다.



손민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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