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주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구금됐단 소식이 전해진 늦은 밤. 나는 워싱턴 사무실에서 기사 마감을 하고 버지니아 집으로 향하는 66번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 심란한 가운데 차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가요 플레이리스트에 습관처럼 몸을 맡긴 채였다.
“난 사람이었네/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루시드폴의 ‘사람이었네’. 낯선 미국 땅에서 졸지에 구금시설에 갇혀버린 우리 노동자들이 겹쳐 떠오를 수밖에 없는 노랫말.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불법 이민자 단속에 속도를 내는 이민세관단속국(ICE) 입장에선 ‘사람’은 그저 ‘숫자’였을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모든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고 공약했고, ICE는 하루 3000명씩 잡아들이는 내부 목표를 세웠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내 말 좀 들어달라고.”
노래는 후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어떤 이유로 구금됐는지조차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도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이민 당국은 ‘원칙’을 내세웠다고 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원칙’을 쉽게 반박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우리 기업들이 비자 발급의 장벽을 핑계 삼아 법을 우회해 인력을 불러들인 건 일부 사실이었으니까. 이 역시 노동자를 세심히 보살펴야 할 ‘사람’이 아닌, 공장 건설에 필요한 인력, 그러니까 ‘숫자’로만 계산한 결과일지 모른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6일 대정부 질문에서 “과거에 알던 미국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고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전례 없이 혹독한 대외 정책을 쏟아낼 거라는 건 익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 외교 당국은 과거와 다른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사전 준비를 해왔는가.
트럼프식 신고립주의는 이민자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서 할당량에 따라 내쫓아야 할 ‘숫자’로 치환하는 배타성이 특징적이다. 그러니 이에 대응하는 우리 외교 정책의 맨 앞줄엔 역으로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강대국의 거친 대외 정책에 희생될지도 모를 개별 국민의 사람다운 삶을 지켜내는 일. 그것이 정부가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가치일 테니까. 그날 밤, 루시드폴의 고조되는 후렴구는 그래서 무슨 기도문처럼 간절하게 읊조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