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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좀 도와줄래?"…수년간 은둔했던 아들이 달라졌다

중앙일보

2025.09.20 17:00 2025.09.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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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 열린 ‘제1회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지원정책 포럼’. 단상에 올라 자신의 사연을 담담하게 소개하던 A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A씨 아들은 수년간 어두컴컴한 방안 속 PC게임 세상이 전부인 고립·은둔 청년이었다.
고립 은둔 생활 중인 청년 이미지. 사진 셔터스톡

평범했던 A씨 아들의 삶은 몇 해 전 치른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송두리째 바꿔 놨다고 한다. 원하지 않았던 대학 입학은 곧 자퇴로 이어졌고, A씨 아들은 게임에 몰두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은둔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방문까지 굳게 잠갔다. A씨는 다 자신 탓 같았다고 한다. 와중에 어려움은 또 찾아왔다. A씨 남편에게서 ‘암’이 발병한 것이다. 남편 간호에 매달릴수록 아들의 방은 더욱 컴컴해졌다.

A씨는 ‘가슴앓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직전 서울청년기지개센터를 알게 됐다고 한다. 센터에서 제공하는 ‘고립·은둔청년 지킴이 양성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 내용을 활용해 끊어진 관계들을 잇기 시작했다. 우선 남편부터였다. 대화 시간을 늘리고 자전거 라이딩이란 공통의 취미를 가졌다. 둘 사이 켜켜이 쌓인 갈등이 풀리자 자녀와의 관계 복원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시간이 맞지 않아. 피곤해”라고 말하던 A씨 남편도 올해부터 해당 양성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서울청년기지개센터 내부 모습.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집 속의 집' 콘셉트로 설계됐다. 여러 개의 방 중 '내 방'에서 센터를 찾은 청년들이 쉬고 있다. 중앙포토

A씨 부부는 교육을 받은 이후 은둔 생활 중인 아들에게만 시야가 좁혀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힘들어도 부모에게 말 못 하고 홀로 쓸쓸히 견딘 딸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딸은 이미 마음의 상처가 꽤 깊었다. 센터 전문 상담사의 “자기분화(가족치료 이론 핵심개념·관계 안에서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를 위해 쉼 공간(독립)이 필요하다”는 상담 내용은 큰 도움이 됐다.

A씨는 아들이 방 밖을 나오게 하는 것부터가 중요했다. “집안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설거지, 마늘 까기, 방 청소, 빨래 거두기 등 소소한 부탁이 통했다. 아들은 방을 나왔고, 심지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A씨는 그때마다 커피로 고마움을 전했는데, 어느 순간 방문이 ‘끼익’ 열렸다고 한다.

A씨는 최근 태블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아들을 찾았다. 식탁에 놓고 나왔는데, A씨 아들이 먼저 “이건 이렇게 하시고요, 저런 저렇게…”라며 알려줬다고 한다. “누나 보고 해달라고 해”하던 아들은 이제 없었다.

A씨는 이참에 가족상담학 공부까지 시작했다. 그는 “제가 배우지 못해 자녀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고 자책을 많이 했다”며 “지금은 도와주는 사람들, 다양한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A씨는 “아들과 저 역시 발전하고 성장해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9월 12일 서울시는 '외로움 없는 서울' 정책의 일환으로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서울청년기지개센터' 개소식을 열었다. 청년들과 송편을 빚고 있는 오세훈 시장. 사진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전담기관인 서울청년기지개센터가 문을 연 지 1년이 됐다. 센터는 50여 개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일상회복→관계망 형성→사회진입’을 돕는다. 서울시에 따르면 그동안 부모 등 927명이 고립·은둔 청년 지킴이 양성교육을 받았다. 청년 5743명도 센터를 다녀갔다.

설립 1년이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가 숫자로 나타났다. 센터 조사 결과, 맞춤형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들의 고립도와 우울감 모두 20%가량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기효능감은 19.6% 올랐다. A씨처럼 고립·은둔 청년을 자녀로 둔 부모의 효과가 더욱 두드러졌다. 자녀 이해도가 97%로 향상됐고, 관계 개선 역시 77%로 조사됐다.
서울시 김철희 미래청년기획단장이 고립은둔 청년 현황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김철희 서울시 미래청년기획관은 “지난 포럼은 전국 최초로 고립·은둔 청년 전담기관을 설치하고 정책을 펼쳐온 서울시의 성과를 점검하는 자리였다”며 “고립·은둔을 떨쳐낸 회복 경험이 청년들의 자기 주도적 성장과 사회 진입, 나아가 사회적 기여로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더욱 관심을 갖고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김민욱([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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