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일본영화 ‘국보’ 초청 기념 기자회견에 자리한 재일교포 3세 이상일(51) 감독은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이 감독은 “가부키는 극장이 아니라 현장에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있고, 러닝타임이 3시간이라 흥행을 예상하긴 어려웠다. 가부키가 일본인에게 익숙하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예능은 아니라서 관객들도 발견하는 자리가 됐을 것 같다”고 흥행 이유를 돌아봤다.
지난 5월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최초 공개 후 지난 6월 6일 일본에서 개봉한 ‘국보’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이나 화제성 높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올해 하반기 국내 개봉이 예정됐다.
영화는 야쿠자 집안 출신 소년이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일본에선 개봉 102일 만인 지난 15일 천만 관객을 모으며 역사적인 흥행성과를 내고 있다.
일본 실사영화로는 높은 제작비인 12억엔(약 113억원)을 들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3시간을 넘는 등 일본 현지에서 말하는 ‘흥행공식’을 어겼지만, 흥행 수익 약 142억엔(약 1335억 4390만원, 지난 15일 기준)을 거둬들이며 일본 내 ‘가부키 붐’을 불러일으켰다. 실사영화로는 2003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인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에 이어 역대 흥행 2위에 올랐다.
1999년 ‘아오 ~춍~’을 통해 데뷔한 이상일 감독은 2006년 아오이 유우 주연의 ‘훌라걸스’로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감독·각본상 등을 받으며 일본 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용서받지 못한 자’(2013)가 베니스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이번 ‘국보’는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작품은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상일 감독이 요시다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건 ‘악인’(2010), ‘분노’(2016)에 이어 세 번째. 이 감독은 “‘악인’과 ‘분노’가 살인 등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는 이야기라면, 이번엔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감독이 꼽은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의 ‘업’(業)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주인공인 기쿠오(요시자와 료·吉沢亮)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横浜流星)는 가부키 세계에서 각각 재능을 타고난 아웃사이더,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각각이 짊어진 나름의 고뇌가 엮이고, 이들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국보가 된 가부키 배우의 삶이)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아니지만, 고도로 예술적인 면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이런 면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감독은 “잘 알려진 배우들이지만, 가부키를 연기하며 연기인생을 걸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한 배우 요시자와 료는 “촬영 전에 가부키 춤 무용연습만 1년 6개월에 걸쳐 했다. 이 춤을 어떻게 아름답게 출 수 있을지 굉장히 준비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니 감독님께서 ‘단지 예쁘게만 춰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감정에 맞춰서 춤을 춰달라고 어려운 디렉션을 줬다”고 했다.
요시자와는 이어 “가부키 배우가 아닌 일반 배우가 (이 작품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연기와 감정에만 몰입했고,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요시자와의 아역으론 국내 관객들에게 ‘괴물’(2023)로 알려진 쿠로카와 소야(黒川想矢)가 등장한다.
영화에선 궁녀로 변신한 공주가 문지기에 복수하는 이야기인 ‘세키노토’, 동물 사자를 춤으로 표현하는 ‘렌지시’(連獅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연인이 함께 생을 마감하는 극 ‘소네자키 동반자살’(曾根崎心中) 등의 가부키 극을 배우들이 연기한다.
감독은 “가부키에 선입견이 없는 분께 촬영을 부탁하고 싶었다. 파친코 2(6~8편)를 함께 만든 소피안 엘 파니 감독이 촬영을 해주었는데, 가부키를 처음 본 심정을 담고 그때 본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포착해주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이상일 감독은 한국어 이름을 쓰고 있지만 재일교포 3세다. 일본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일본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혈통’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에 자신의 고민이 들어가진 않았을까.
그는 “제 피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고 한국어로 말한 후 “사회 변두리의 인물에 주목하고 눈이 갔던 건 사실이다. 그때 나의 (재일교포) 아이덴티티가 작용했을 것 같은데, 직접 작품과 관련됐는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고자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