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1관, 가로 4m가량 크레이트(미술품 운반 전용 상자)를 열자 또 다른 나무상자가 나왔다. 상자와 상자 사이엔 폴리카보네이트 매트를 덧대 혹시 있을지 모를 충격을 방지했다. 조심조심 뚜껑을 열자 흰 바탕에 검은 손, 골반뼈와 대퇴골 그림이 드러났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88)의 '육체와 영혼(Flesh & Spirit)'이 국내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 가로 세로 각각 368.3㎝ 대작이라 두 개의 크레이트에 나눠 운반했고, 아랫부분부터 개봉했다.
주머니 달린 앞치마를 두른 채 대기하던 쿠리에(작품 호송인) 니키 슈미트가 조사등을 비추며 그림에 다가갔다. "샌프란시스코의 파커 재단에서 출발해 뉴욕의 수장고에서 작품 상태를 확인한 뒤 포장해 DDP까지, 일주일째 긴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종이를 덧댄 콜라주 작품인 데다 네 부분을 경첩으로 연결한 그림이라 체크할 곳이 많았다. 슈미트는 "출발 전 만들어 둔 그림 상태에 대한 보고서가 11페이지에 달하는데, 운송 후 달라진 점이 없나 확인하고 있다. 일단은 아주 좋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1983년 스물세 살 바스키아가 그린 이 그림은 컬렉터 돌로레스 오르먼디 노이만이 1만5000달러(약 2078만원)에 사들여 35년 동안 간직했다. 노이만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유진 오르먼디의 조카다. 2018년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 그림을 파커 재단이 3070만 달러(약 425억원)에 사들였다. 중앙일보 창간 60주년 특별전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에 나오는 바스키아 작품 70여점 중 가장 크다. 전시를 기획한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는 "이 한 점의 운송비만도 1억 5000만원이 넘어 빌려올 엄두를 못 냈지만, 파커 재단에서 미국 국립예술기금을 신청해 비용을 부담해 줘 전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12일부터 인천공항을 통해 바스키아의 명작이 속속 들어왔다. 8개국에서 대한항공의 10개 화물 노선으로 온 크레이트 63개다. 고가의 미술품부터 의약품ㆍ위험물까지 특수 화물은 특히 운송 조건이 까다롭다. 여러 겹 포장한 뒤 질소를 투입해 산화 반응을 차단하기도 한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공항에서 수량ㆍ외포장 점검 및 중량 측정을 거쳐 화물 보안검색을 마치고, 쿠리에가 동승해 직접 운송 과정을 모니터링하기도 한다"며 "2011년 외규장각 의궤, 2021년 피카소의 110여 점도 이렇게 국내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파커 재단의 경우 '육체와 영혼' '메이슨 랏지' 두 점에 각각 쿠리에가 동행했다. 쿠리에 에리카 아바드는 "바스키아 작품은 콜라주로 붙인 것들이 많아서 종이가 떨어진 곳은 없는지 더욱 섬세한 관찰이 요구된다"며 "소장처의 대여 상황에 따라 연간 3~5회 정도 작품과 함께 여행한다"고 말했다.
바스키아 작품은 공항 근처 수장고에 머물다가 5대의 무진동 트럭에 나눠 18일 DDP로 이동했다. 트럭 앞뒤에 사설 경호 차량이 한 대 씩 동행했다. 이렇게 이송된 ‘박물관 보안(브로드웨이 붕괴)’ ‘에슈(Exu)’ ‘왕이라 불린 A-One의 초상’ 등 70여점의 회화 드로잉과 총 155페이지의 창작 노트 8권, 냉장고에 그린 그림 등이 소더비 출신의 레지스트라(작품 관리인) 줄리 조세프, 국내 보존처리인 2명의 확인을 거쳐 전시장에 걸렸다. 22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23일부터 DDP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23일 오후 4~6시에는 서울대학교 문화예술원에서 ‘예술가의 유산과 재단’이라는 주제로 바스키아 재단 데이비드 스타크 이사장, 바스키아의 창작 노트 등을 소장하고 있는 래리 워시, 박서보 재단 박승호 이사장,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가 대담한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성인 2만4000원. 더 중앙 플러스 ‘The Art’ 멤버십 1만6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