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디리스킹(de-risking, 중국 의존 축소)’ 전략은 중국을 공급망에서 밀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을 공급망의 상위 단계로 끌어올렸다.
값싼 인건비를 찾는 조립 공정이 주변국으로 이동하면서, 중국은 동남아 수출 급증을 떠받치는 부품·소재·기계의 핵심 공급자가 됐다. 2024년 기준 아세안은 미국과 유럽연합보다 더 많은 중국 제품을 수입했는데, 그 대부분은 중간재(부품·소재)와 자본재(기계·설비)였다. 중국은 ‘공장 뒤의 공장’으로 변모한 셈이다.
변화를 이끄는 힘은 세 가지다. 첫째, 지정학 갈등과 관세로 중국 무역이 신흥시장으로 방향을 틀었고, 아세안은 최종 시장이자 서구 소비자에게 가는 관문이 됐다. 둘째, 중국의 임금 상승은 노동집약적 공정을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으로 밀어냈다. 셋째, 중국은 제조업의 고도화로 완제품 대신 고부가가치 부품과 장비에 집중하게 되었다.
산업별 사례는 뚜렷하다. 베트남·말레이시아의 전자제품에는 중국산 회로기판과 배터리가 들어가고, 아세안산 태양광 모듈은 중국산 웨이퍼와 장비에 의존한다. 방글라데시까지 걸쳐 있는 의류 산업은 중국산 원단과 실을 사용하고, 베트남의 가구 역시 중국산 부품으로 조립된다. 자동차·전기차 분야에서 중국 기업은 부품을 공급하고 현지 공장을 세우며, 배터리·모터·소프트웨어 표준을 확산시키고 있다.
역방향 흐름도 있다.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는 니켈을 현지에서 제련해 중국으로 수출한다. 중국 자본이 지원한 제련소들은 스테인리스강과 배터리 부품을 중국에 공급한다.
이 구조는 양측에 이익을 안긴다. 중국은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유지하고, 제3국을 거쳐 수출하며 관세를 피하고, 과잉 생산도 흡수한다. 아세안은 값싼 자재·기계·투자를 바탕으로 산업화를 가속해 일자리와 시장을 키운다. 전 세계 소비자는 더 싼 제품을 얻는다. 그러나 위험도 커진다. 아세안 공장은 중국산 투입재 의존으로 공급망 충격에 취약하다. 값싼 중국 제품은 현지 기업을 압박하고, 무역 불균형은 정치적 긴장을 키운다. 중국의 과잉 생산은 해외에 가격 하락 압력을 수출해 투자와 마진을 잠식할 수 있다. 많은 국가는 여전히 저부가가치 조립에 머물러 있다.
이제 과제는 이익은 살리고 취약성은 줄이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현지 공급업체를 육성하고, 투입재를 다변화하며, 합리적 현지조달 규정을 활용해야 한다. 중국은 고부가가치 중간재로 전환하면서 환경·노동 기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미국도 단순히 조립지를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중국 의존을 줄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