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코더를 들고 다르덴 형제 감독 등 거장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화와 극장의 의미를 묻는 노신사. 무릎이 안좋아 지팡이에 의지해 걷지만, 유서 있는 국내외 작은 극장들을 탐방하는 열정을 보면 영락없는 청년이다. 전세계 영화인들로부터 ‘미스터 김’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 김동호(88)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 집행위원장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뜨거워지는 영화 열정 때문에 ‘청년 동호’란 별명도 붙었다.
단편 영화(‘주리’)를 연출하고, 다큐멘터리(‘영화 청년, 동호’)에도 출연한 김 전 위원장이 이번엔 다큐멘터리 ‘미스터김, 영화관에 가다’를 만들었다. 그의 장편영화 감독 데뷔작인 다큐는 서른 돌을 맞은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됐다. 30년 전 초대 집행위원장이 신인 감독으로 돌아온 의미 있는 사건이다.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김 전 위원장을 만났다. “감독 데뷔를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건네자,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장편 감독으로 내가 만든 영화제에 초청 받아 감회가 새롭다”고 답했다.
Q : 다큐를 찍게 된 계기는 뭔가.
A : “원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코리아타운 사연을 다큐로 만들려 했는데, 코로나19 확산 등 여건이 맞지 않아 무산됐다. 대신 국내외 작은 극장을 찾아다니며 극장이 처한 상황을 담아보기로 하고, 재작년 2월 캠코더를 사 촬영에 들어갔다. 수많은 영화인들도 만나 극장의 의미와 극장에 관객이 돌아오게 하려면 무얼 해야 할 지 물었다.”
사나이픽처스가 공동 제작한 다큐에서 김 전 위원장은 광주극장 등 국내의 유서 깊은 극장들은 물론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대만·일본의 소극장을 찾아다니며 극장의 현실과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 등을 취재했다. 다르덴 형제, 뤽 베송,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거장 감독들도 기꺼이 ‘미스터 김’의 다큐에 출연해 영화와 극장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펼쳐 놓는다. 이들에게 극장은 “위대한 탈주를 위한 장소”(다르덴 형제 감독)이자, “삶을 배우는 학교”(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다.
Q : 인터뷰한 영화인들의 면면이 상당하다.
A : “영화제를 하면서 쌓은 인맥 덕분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미스터 김의 요청은 거절할 수 없다. 나보고 북극에 가라고 해도 갈 것’이라고 하더라.”
Q : 자신에게 영화와 극장의 의미는 뭔가.
A : “영화는 내 인생이다. 30년 공직 생활을 한 뒤 30년 간 영화 일을 보람을 느끼며 헌신적으로 했다. 내게 영화는 꿈이고, 극장은 꿈의 공장이다.”
Q : 강렬했던 극장의 기억이 있다면.
A : “부산 피난 시절이던 중학교 2학년 때(1952년), ‘분홍신’(1948)이란 영국 영화를 봤는데, 그게 극장에서 본 첫 영화다. 오래 전이라 붉은 색과 무용 외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인생은 아름다워’(1999)를 처음 봤던 때도 기억에 남는다. 내 인생 영화다.”
다큐에는 박찬욱·봉준호·이창동 감독 등 국내 영화인이 100명 가까이 출연해 영화계 위기, 극장의 미래 등에 대한 생각을 들려준다. “리스크가 있더라도 투자하고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홍정인 메가박스중앙 대표), “창작자들이 고유의 매력과 개성을 고수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강제규 감독) 등 영화인들이 내놓은 처방은 결국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은 돌아온다’는 것이다.
Q : 영화계 위기를 타개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A : “좋은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이 극장에 오게 하는 방법 외엔 없다. 시나리오 개발부터 제작 지원까지 정부가 대폭 지원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영화의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원인 중 하나가 공동 제작이다. 우리도 젊은 감독들이 주변국 감독들과 공동 제작을 해서 국제 경쟁력도 높이고 시장도 넓혀야 한다.”
Q : 한국 영화의 힘을 믿는 영화인들이 많더라.
A :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게 너무 많고, 젊고 새로운 재능들이 주목 받게 될 것이다. 모험을 통해 영화 산업의 두께를 키워야 한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에 공감했다.”
Q : ‘청년 동호’의 다음 목표는 뭔가.
A : “상업 영화를 찍고 싶은 바람이 있다. 권지예 소설가의 단편 ‘꽃게무덤’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작가도 영화화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내가 연출해서) 영화사 한 곳을 폭싹 망하게 할까 봐 조심스럽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