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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거주자 20년 만에 5배로…국가경쟁력 키우는 다양성의 힘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㉜]

중앙일보

2025.09.21 13:00 2025.09.2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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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㉜ 다문화 사회

안산시 원곡동 ‘다문화음식거리’ 풍경. 원곡동은 주민 2만여 명 중 70%에 해당하는 1만4000여 명이 외국인 거주자다. [사진 안산시]
지하철 4호선 안산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골목 좌우에는 식료품과 각종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베트남·러시아·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문자가 한글과 함께 표기된 간판들이 눈에 띈다. 골목 안쪽에는 할랄(무슬림에게 허용된 식품이나 소비재) 정육점이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이곳은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에 있는 ‘다문화음식거리’다. 주말에는 서울과 수도권의 다른 도시에 사는 외국인들까지 몰려든다. 원곡동은 ‘경기도의 이태원’ ‘국경 없는 마을’로 불린다.

이곳에 외국인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낮은 임금, 높은 노동 강도로 내국인이 기피하며 떠난 반월·시화 공단의 빈자리를 중국과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채웠다. 2010년대부터는 거주자들의 국적이 다양해졌다. 세계 각국의 음식 재료와 생활용품을 파는 도소매점이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원곡초 6학년 교실 게시판. 이 학교 학생의 90% 이상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중앙포토]
원곡동은 외국인 최다 밀집지역이다. 주민 2만여 명 중 70%인 1만4000여 명이 외국인이다. 원곡동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에는 각종 안내문이 영어·중국어·러시아어·우즈베크어·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카자흐어 등 다양한 언어로 돼 있다. 인근 원곡초등학교는 전교생 450여 명 중(2024년 기준) 420여 명이 20여 국적의 다문화 가정 배경을 갖고 있다. 학교 앞에서 만난 학부모 아이게림 툴레게노바(카자흐스탄)는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이 2개 국어로 오고 있어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전국 초·중·고 다문화 학생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10년 전인 2015년 8만2000여 명의 두 배 반이다. 현재 국내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100명 중 6명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세 가지 다문화 트리거…공단·결혼·세계화
신재민 기자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 신화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통상 외국인 체류자가 인구의 5% 이상이면 다문화 국가로 본다. 국내 체류 외국인은 273만 명(2025년 상반기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약 5.3%를 차지한다. 43만9000가구에 이르는 다문화 가정까지 포함하면 전체 외국인·다문화 인구는 350만 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외국인은 전체 인구의 1% 남짓에 불과했다. 20여 년 만에 다섯 배 이상으로 불었고, 국적도 다양해졌다. 외국인 비율이 프랑스·영국·캐나다(6~8%)와 큰 차이가 없다.

1992년 한·중 수교는 외국인들이 한국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였다. 중국 국적을 가진 교포들이 대거 유입됐다. 94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선언’ 기조도 외국인의 국내 이주를 늘리는 배경이 됐다. 지자체들의 주도로 농촌 총각들의 국제결혼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중반부터다.

지난 6월 거제시 한화오션 조선소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치킨데이’를 즐기고 있다. [사진 한화오션]
93년 마련된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들어왔다. 불법체류자, 외국인 근로자 인권 침해 등 여러 문제를 낳자 2004년부터 ‘고용허가제’가 생겼다. 외국인 인력을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가·관리하는 제도다. 20여 년 동안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외국인 수는 누적 100만 명(2024년 기준)에 이른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조선업조차도 외국인 인력이 없으면 유지가 어렵다. 지난해 새로 투입된 조선업 인력의 86%가 외국인이다. 전남 영암군 삼호읍은 전체 인구(3만여 명)의 30%가 넘는 1만여 명이 외국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소에서 일한다.

이민·다문화 전문가인 이성환 박사는 “한국은 2000~2008년 8년 사이에 외국인 거주자가 4배 가까이 증가했다”며 “공존의식과 소통 방식의 부족으로 차별과 갈등이 곳곳에서 나타났다”고 했다. 한국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다문화 사회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외국인과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지만, 갈등과 차별은 여전하다. 지난 2월 전남 나주에서 이주노동자를 화물에 묶어 지게차로 들어올려 괴롭힌 사건이 있었다. 15년 전 국내 처음으로 ‘이민학’을 명지대에 개설한 정지윤(국제다문화 전공) 교수는 “내국인을 위한 다문화 인식 교육이 더 중요하다”며 “이주 배경을 가진 이들은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미래를 함께 설계할 파트너”라고 했다.

지난 8월 부산 벡스코 제2전시장에서 ‘2025 외국인 유학생 채용박람회’가 열렸다. 행사장을 찾은 외국인 유학생들. [중앙포토]
‘외국인=공단 노동자’라는 등식도 차츰 깨지고 있다. 유학생·연구자·전문기술자 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체류 외국인 유학생 수는 약 27만 명(2024년 기준)이다. 한국 거주 외국인 10명 중 1명꼴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다문화 사회가 국가 경쟁력의 한 축으로 진화할 때라고 말한다.

스포츠 분야는 다문화가 곧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7월 독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남자 400m 계주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대표팀 두 번째 주자는 나마디 조엘 진(19)이 있다.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대표팀은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카리브해·중동 등에서 온 이민 가정 2·3세 출신이었다. 이병수 스포츠 칼럼니스트는 “다문화 선수 영입은 단순한 전략적 선택을 넘어 한국 스포츠와 사회가 더 넓고 열린 세계로 나가는 신호탄”이라고도 했다.

현대차 창사 이래 첫 외국인 CEO에 발탁된 호세 무뇨스. [사진 현대자동차·기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 전문직 비자(E1~E7)를 가진 이들은 13만 명(2024년 기준) 정도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산업과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해외 인재 영입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현대자동차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는 파격 인사를 했다. 스페인 출신의 호세 무뇨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북미·중남미법인장 시절 최대 실적을 경신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줬다. 자율주행기술 개발 회사인 서울로보틱스는 임직원 55명 중 20명이 외국인이다. 특히 핵심 부서인 엔지니어 부문은 절반 가까이가 독일 뮌헨공대, 스위스 취리히연방 공대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학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

세종 때 과학자 장영실도 다문화 출신
인재 특별귀화 제도(2011년부터 시행)를 통해 한국 행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제도 시행 15년이 다 돼 간다. 그러나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들은 200명 선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다. 2023년 정부는 이공계 석·박사급 외국인을 대상으로 ‘우수 인재 영주·귀화 패스트트랙’을 도입했다. 6년 이상 걸리던 영주권·국적 취득 절차를 3년으로 간소화한 것이 골자다. 하지만 패스트트랙은 과학기술 인재만을 대상으로 한다. 다른 분야는 국내 4년제 대학에서 부교수 등으로 수년 동안 재직해야 하는 등 필수 요건이 까다롭다.

해외 인재가 한국 행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선 지원책 마련이 더 필요하다. 이들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건 정착 초기 가족과의 정주 환경, 자녀 교육 문제 등이라고 한다. 지난 2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이공계 인재 강국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민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권한대행은 “연구비도 중요하지만 연구자 가족이 국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유연한 비자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민자를 원스톱으로 지원할 이민청 설립 필요성도 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논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자격루(물시계)·앙부일구(해시계) 등을 만들어 조선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룬 장영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조선에 귀화한 원나라 후손인 아버지와 기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관노였던 장영실이 훗날 정3품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발탁한 세종의 열린 생각과 포용적 태도 때문이었다. 다문화는 한국 사회에 포용력과 다양성을 더해 국가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다. 한류가 아시아를 벗어나 미국·중남미, 중동과 유럽에서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개방성, 이를 바탕으로 한 창의성이 잘 융합됐기 때문 아닐까.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통일벼와 녹색혁명’ 편입니다



고성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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