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노르웨이 최북단에 위치한 트롬쇠(Tromsø)의 날씨는 한국의 가을과 비슷햇다. 북위 69도에 위치했지만, 홑겹 셔츠만 입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항구엔 남쪽에서 온 상선과 제각각 모양을 한 요트가 서로를 지나쳤다. 항구 앞 공원엔 탐험가 로알 아문센의 동상이 있다. 아문센은 1901년 이곳에서 처음 선장이 됐다. 동료를 구하러 떠난 마지막 비행의 출발지도 트롬쇠였다. 아문센처럼 당시 유럽 북극 탐험대는 대부분 트롬쇠를 거쳐 갔다.
이곳 주민 율리안 스벤센은 "그땐 최신 정보를 얻어 위험한 항해의 변수를 줄였고, 부두 앞 선술집에서 대원을 모집했다. 인구 8만 명에 불과하지만 100여 년 전부터 ‘북극 수도’로 불린 까닭"이라며 "지금은 트롬쇠가 북극 개발의 전초기지이자 북극항로의 거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고설명했다.
트롬쇠는 아문센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북극을 둘러싼 8개국 협의체인 북극이사회(AC) 사무국이 이곳에 있다. 매년 1월엔 전 세계 전문가가 모이는 국제회의 ‘북극 프런티어’가 열린다. 트롬쇠 대학교는 다른 이름이 노르웨이 북극대학교(UiT)일 정도로 북극 관련 교육과 연구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한국 극지연구소와의 협업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로 '탐험의 영역'이던 북극 길이 선진국이 탐내는 ‘얼음 실크로드’로 변하고 있다. 트롬쇠는 아시아에서 북극항로를 거쳐 러시아를 빠져나올 때 닿는 주요 항구 중 가장 크다. 트롬쇠 대학에서 북극 경제를 전공하는 레아 카우르는 “노르웨이는 동쪽으로 스웨덴에 막혀 있다. 바다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북극 개발이 시작되면 트롬쇠 등 북부 지역이 더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1일 오후 그린란드 수도 누크항으로 아이슬란드 국적의 대형 컨테이너선(EIMSKIP)이 들어왔다. 작은 항구가 꽉 차는 느낌이다. 이곳 주민 온 크레비그는 "아직 그린란드의 무역은 주변국을 통해 제한적으로 이뤄지지만 앞으로는 저런 컨테이너선이 자주 드나들며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린란드는 3개의 북극항로 중 캐나다 북부 해역을 지나는 북서항로(NWP)와 북극점에 가까운 곳으로 알래스카와 아이슬란드를 연결하는 북극횡단항로(TSR)가 지나는 핵심 요충지다.
올해 초 그린란드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린란드의 소유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트럼프의 욕심엔 이유가 있다. 그린란드는 두 항로가 지나는 지리적 장점에 더불어 막대한 가스와 희토류가 매장된 자원의 보고다. 북극점에서 가장 가까운 거주지로서 군사적 중요성도 크다. 마리아 아크렌 그린란드대학 북극사회경제학과 교수는 "북극항로가 활성화하면 수출의 95%를 어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다각화하고, 광업과 관광 등 새로운 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극항로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길이다. 온난화로 온도가 상승하면서 북극 해빙 면적은 계절에 관계없이 작아지고 있다. 미국 국립빙설데이터센터(NSIDC)에 따르면 지난 9월 16일 북극의 해빙 면적은 471만㎢로 평년값(1981년~2010년) 645만㎢보다 174만㎢나 줄었다. 알래스카 면적(172만㎢)에 버금가는 해빙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21년 내놓은 6차 보고서에서 2050년 내로 북극해가 여름철 ‘무빙(Ice-free)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카밀라 브레케 노르웨이극지연구소(NPI) 소장은 “금세기 후반까지 겨울엔 여전히 해빙으로 덮여 있겠지만, 북극 얼음의 양이 줄고,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극적인 탄소 감축 없이는 북극 온난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빙이 비운 자리만큼 뱃길은 넓어졌다. 마침 2023년 예멘 반군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을 공격한 사건으로 주 해상 루트의 안전성이 크게 훼손됐다. 2021년엔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수에즈운하에서 좌초해 일주일간 양방향 운항이 전부 멈춘 일도 있었다. 각국이 대체 루트로 눈길을 돌리게 된 계기였다.
부산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기준으로 수에즈 루트(2만400㎞)를 따르면 통상 30일~34일 정도가 걸린다. 북동항로(NEP, 1만3000㎞)를 이용하면 20~24일이 소요된다. 거리만 놓고 보면 경제성이 있는 셈이다. 지난 20일 중국 해운사 하이지에(Haijie)의 컨테이너선 ‘이스탄불 브리지’호가 칭다오를 출발했다. 중국 내 상하이와 닝보를 들른 뒤 북동항로를 통해 영국 펠릭스토, 폴란드 그단스크까지 간다.
중국에서 펠릭스토에 도달하는 기간은 18일. 수에즈 루트와 비교하면 보름가량 빠르다. 북동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의 물류를 연결해야 큰 의미를 갖는데 컨테이너 첫 상업 운항에 나선 것이다. 출발지∙도착지의 다양한 항구를 들르는 일반적인 물류 시스템을 따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항로는 단순한 교역로가 아니다. 길이 어디로 났느냐에 따라 경제적 득실은 극과 극이다. 수에즈 루트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 교역로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싱가포르는 탄생할 수 없었을 터다. 수에즈 루트에선 한국이 변두리지만 북극항로라면 훌륭한 중간 기착지가 될 수 있다. 절호의 기회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
새 뱃길이 가져올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북극권은 원유와 희토류 등 자원의 보고다. 새로운 전장 앞에 각국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러시아는 자국 앞바다를 전 세계의 배가 다니는 길로 탈바꿈시키려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여기엔 중국도 힘을 보탠다. 캐나다는 본격적인 북서항로 개발에 착수했고, 미국은 그린란드를 노리고 있다. 에너지 수입 다변화와 공급망 안정 차원에서 북극은 한국에도 의미가 작지 않다.
머지않아 북극이사회 8개 회원국 간에 치열한 땅따먹기가 전개될 것이다. 한국만의 경쟁력을 내세워 ‘북극의 파트너’가 될 묘수를 찾아야 한다. 이달 초 정부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북극항로 활용을 위한 협력 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이런 관계를 차분히 확대해 가는 게 중요해졌다.
정지훈 한국북극연구컨소시엄(KoARC) 사무총장은 “북극항로 개척의 핵심 열쇠는 북극권 국가, 현지 주민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며 “환경 파괴 우려를 줄이고, 원주민의 삶터를 보호할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면서 ‘한국은 믿을 수 있다’는 국제적인 신뢰를 쌓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