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 "집단학살로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살아남은 여성들은 치유와 용서의 정치 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르완다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여성 의원 비율을 자랑한다."
넷플릭스 영화 '트리 오브 피스'(Trees of Peace)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 중 일부다.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대학살)의 비극에서 여성들의 강인함을 높이 평가한 표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제노사이드 당시 좁은 지하창고로 피신한 여성 4명이 81일 동안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과정을 그렸다.
임신한 아닉과 수녀 지넷, 미국인 페이턴, 투치족 소녀 무테시는 지하창고에 머무는 동안 극단주의자들에게 발각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음식 부족 등 고통 속에 하루하루 버틴다.
아낙의 남편이자 온건한 후투족인 프랑수와는 가끔 지하창고를 찾아 여성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바깥소식을 전한다.
영화의 언급처럼 르완다의 여성 의원 비율은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1위다.
국제의원연맹(IPU)에 따르면 지난 8월 1일 기준 르완다 하원 의석 80개 가운데 여성 의원이 51명(63.8%)이나 된다.
르완다는 전 세계에서 여성 하원 의원 비율이 60%를 웃도는 유일한 국가다.
그다음으로 여성 하원 의원 비율이 높은 국가는 쿠바(55.7%), 니카라과(55.0%), 멕시코(50.2%) 등이다.
르완다 상원 26석 가운데 여성 의원 비율도 53.8%(14명)나 된다.
결국 르완다에서는 상·하원 전체 106석 가운데 여성이 65명(61.3%)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하원의장인 거트루드 카자와도 여성이다.
르완다 정치에서 여성의 존재감은 30여년 전 제노사이드라는 비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많다.
당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투치족, 온건한 후투족, 트와족을 끔찍하게 살해하면서 많은 남성이 죽었다.
'100일의 제노사이드'가 끝난 뒤 르완다 전체 인구에서 여성 비율은 약 70%나 됐다.
이에 따라 사회 재건과 화합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또 제노사이드 후 집권한 폴 카가메 대통령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대표적으로 르완다 정부는 2003년 헌법 개정을 통해 모든 의사결정 기관에서 어느 한 성별이 30%를 밑돌지 못하도록 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국회에서 여성 비율이 30% 이상을 차지하도록 제도가 바뀐 것이다.
르완다는 여성 의원들이 많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르완다 국회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여성은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이지만 정치적 자리의 4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르완다는 어느 나라보다 여성이 많은 권력을 가진 독보적인 국가"라고 강조한다.
바쿠라무차 은쿠비토 만지 주한 르완다 대사도 지난 7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르완다가 세계적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선도하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여성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려면 할당제 등 르완다 정책을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IPU에 따르면 한국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20.3%로 전 세계에서 119위 수준이다.
그러나 르완다에서 가부장적 문화를 털어내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르완다의 법적·정치적 노력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지만, 경제·사회 등 분야에서 남녀 간 불평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올해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르완다의 성(젠더) 격차 지수는 0.762로 세계에서 39위를 기록했다.
젠더 격차 지수는 1에 가까울수록 양성평등이 잘 이뤄진 것으로 평가되는데 르완다 순위는 여성 의원 비율 1위와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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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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