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22일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권리를 보장하는 규범적 토대로 삼았다”며 ‘법률가로서의 세종대왕’을 소개했다. 여당의 내란특별재판부 추진을 두고 위헌 논란이 제기된 가운데 법치의 기본 정신과 사법독립을 강조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 “세종대왕의 사법 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법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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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세종, 법치주의 구현 위해 한글 창제”
조 대법원장은 “백성을 중심에 둔 세종대왕의 사법 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법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며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법치와 사법 독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내고 정의와 공정이 살아 숨 쉬는 미래를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날 행사는 대법원이 9년만에 개최하는 국제 행사다. 오는 2026년 9월 한국에서 개최 예정인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의 준비 격으로 마련된 행사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법사상을 기반으로 바람직한 사법 발전을 모색하는 자리로, 10여개 국가의 대법원장·대법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틀간 ▶법치주의 수호와 사법 독립 ▶사법 접근성 향상 ▶AI와 사법제도 ▶지식재산권 보호와 사법 등 총 4개 주제에 따라 세션이 진행된다.
조 대법원장은 약 40분에 걸친 이날 개회사에서 “세종대왕은 이미 ‘법의 지배’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시대를 앞서서 실현했다”며 법률가로서 세종대왕의 면모를 소개했다.
그는 “세종대왕은 통일된 법전을 편찬하고, 백성들에게 법조문을 널리 알려 법을 알지 못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백성들이 억울함이 없도록 형사사건 처리를 분명하게 기록하게 하고, 사건 처리가 장기간 지체되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고문과 지나친 형벌을 제한하고 죄수들이 감옥에서 더위나 추위, 질병으로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도 말했다.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법치주의 정신을 구현한 제도적 장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소송 사건을 기록하면, 그 속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정인지서의 내용을 소개했다. 신하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해 “사형 집행에 관한 법문을 이두로 기록할 경우 무지한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답한 일화도 언급했다.
이날 참석자들을 상대로 작은 한글 교실이 열리기도 했다. 조 대법원장은 17개 자음과 11개 모음을 화면에 띄운 뒤 천지인(天地人) 사상에 따른 제자 원리를 설명했다. 한글은 쉽게 배울 수 있다며 “한글을 배우면 자신이 천재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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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시대 속 법치·사법 독립 정신 지켜내야”
세종대왕이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보장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법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도 했다. 이어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신체, 재산에 관한 사건을 다룬다”며 “인류 모두가 세종대왕의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행사에는 싱가포르·일본·중국·필리핀·호주·그리스·이탈리아·라트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몽골·카자흐스탄 등 10여 개 국가의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참석했다. 아카네 도모코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전직 소장, 세계은행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위 관계자 등도 자리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권영준·이숙연 대법관이 연사로 참석해 사법제도 선구자로서의 세종대왕과 AI의 발전이 사법제도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 각각 영어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