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22일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권리를 보장하는 규범적 토대로 삼았다”고 말했다. 여권에서 ‘조희대 사퇴론’을 주장하고, 위헌 논란이 제기된 내란특별재판부를 추진하는 가운데 사법 독립을 강조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은 “백성을 중심에 둔 세종대왕의 사법 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법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며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법치와 사법 독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내고 정의와 공정이 살아 숨 쉬는 미래를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날 발언은 필리핀·싱가포르·일본·호주 등 10여 개국에서 참석한 대법원장·대법관 앞에서 나왔다. 대법원이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다. 이날 행사는 2016년 국제법률심포지엄에 이어 대법원이 9년 만에 주최한 국제행사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약 40분에 걸친 개회사에서 “훈민정음은 백성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정의의 문자이자 법치주의 정신을 구현한 제도적 장치였다”며 훈민정음 창제와 법적 의미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사법의 측면에서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한 정의롭고 공정한 사법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통일된 법전을 편찬하고, 백성들에게 법조문을 널리 알려 법을 알지 못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법률가 세종대왕의 면모를 소개하면서다.
“세종대왕은 이미 ‘법의 지배’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시대를 앞서서 실현했다”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백성들이 억울함이 없도록 형사사건 처리를 분명하게 기록하게 하고, 사건 처리가 장기간 지체되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훈민정음에 대해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소송 사건을 기록하면, 그 속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훈민정음해례』의 정인지 서문의 내용을 소개했다.
조 대법원장은 세종대왕이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보장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법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조 대법원장이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한 데 대해 “희대의 방법으로 내란수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구속 취소하고 석방한 법원의 수장으로서 할 말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조 대법원장의 발언을) 평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참모들이 써 준 원고라 하더라도 그런 말을 읽을 때 본인의 양심이 어떻게 요동쳤는지 매우 궁금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국 법관들, 25일 대법관 증원 토론=전국법관대표회의는 25일 오후 7시 여당이 사법개혁안으로 추진하는 대법관 증원 및 추천방식 개선안 놓고 상고심 제도개선 온라인 토론회를 연다고 22일 밝혔다. 법관대표회의 재판제도분과위원회는 이날 보고서에서 “‘상고심 충실화’를 입법 취지로 하는 대법관 증원안은 경청할 부분이 많다”며 “상고심 개선 논의가 반복되는 상황과 관련해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재판을 해왔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자성론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