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복용되는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을 임신 중에 복용할 경우 자폐아 출산 위험을 높인다고 발표해 논란이다.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타이레놀은 다른 성분의 진통제보다 임신 중 위험도가 낮다는 기존 의학 지침을 뒤집는 주장이다. 미 의학계에서는 “타이레놀 복용과 자폐아 출산 사이 과학적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식품의약국(FDA)을 통해 극심한 고열 등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소량만 복용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을 제한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000년 대비 자폐증 유병률이 약 400% 늘었다는 미 보건당국의 통계를 들어 “임신부는 물론 아기도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어 “타이레놀은 매우 비싸서 쿠바는 ‘그것’이 없는데, 그래서 쿠바엔 본질적으로 자폐가 없다고 한다”고 주장하며 “곧 국립보건원(NIH)이 자폐증 관련 연구 13건을 발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타이레놀의 원료인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신부가 통증이나 발열이 있을 경우 의사들이 흔히 처방하는 약물이다. 여러 진통제 성분 중 임신부와 태아에게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애드빌’로 알려진 이부프로펜 계열이나 아스피린 같은 아세틸살리실산 계열, 나프록센 계열의 진통제는 태아의 심장혈관 조기 폐쇄나 양수 감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권장되지 않아 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타이레놀마저 해열제로 복용하지 말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안타깝게도 타이레놀의 대안도 없다. 아시다시피 아스피린이나 애드빌도 확실히 해롭다는 게 입증됐다”라며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복용해야 하겠지만, 조금만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학설’이라고 지적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최소한 먹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고 재반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직후 타이레놀 제조·판매 업체인 ‘켄뷰’의 주가는 하루 만에 7% 급락했다. 이달 초 관련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22일까지 누적 하락률은 16%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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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 발열 치료하지 말란 소린가” 학계 반발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백신 불신론자로 유명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의 의견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5일 케네디 장관이 임신부가 타이레놀을 먹으면 아이에 자폐를 유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이달 말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미 산부인과학회는 이날 낸 성명에서 “환자들에게 혼란스럽고 해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학회는 “20여년 이상,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사용이 아동의 신경발달 장애를 일으켰다고 볼 만한 신뢰할 만한 연구는 단 하나도 없다”며 “아세트아미노펜은 통증과 발열을 치료할 수 있는 임신부에게 사용 가능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이며, 치료하지 않은 발열이나 통증은 임신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품청(EMA)도 이날 각각 타이레놀과 자폐증의 상관 관계에 대해 “증거가 일관되지 않다”,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신중한 반응을 내놓았다.
연구 결과도 엇갈린다. 2020년 미 의학협회 산하 정신의학 학술지(JAMA Psychiatry)에 실린 한 연구에서는 탯줄 혈액에서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많이 나온 아이일수록 자폐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 위험이 높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올해 미 의학협회 종합 학술지(JAMA)에 발표된 스웨덴 아동 248만명 대상 대규모 조사에선 다른 결론이 나왔다. 형제끼리 비교해 보니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과 자폐·ADHD 발병 사이에 뚜렷한 관련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마틴 마카리 FDA 국장은 “최근 몇 년간 임신부의 아세트아미노펜 복용과 자녀의 자폐증 및 ADHD와 같은 신경학적 질환 발병 위험 증가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누적됐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명확히 하자면 아세트아미노펜과 자폐증 사이의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다”며 “과학 문헌에는 반대 연구 결과도 있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