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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마음 읽기] 쌀단지

중앙일보

2025.09.23 08:12 2025.09.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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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게도 슬슬 돈이란 게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저학년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고학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도 사 먹어야 하고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도 빌려보지 않고 구매해 읽고 싶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과자야 급하면 닭장 속의 달걀을 가져가 물물교환하면 되지만 잡지는 가격이 비싸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암탉을 훔쳐 내다 팔 배포는 없었다. 결국 엄마에게 손을 내밀곤 했는데 매달 돈을 주지는 않았다. 연재만화의 다음 편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울며불며 애원해도 엄마는 돈이 없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직접 돈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잡지 살 돈 달라는 아들 눈 피해
엄마가 품 팔아 번 돈 감추던 곳
세상엔 숨길 수 없는 게 있으니

김지윤 기자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엄마가 숨겨놓았을 돈을 찾아내려고 탐정의 눈빛으로 집안 곳곳을 살폈다. 가장 먼저 반닫이 문을 열고 자그마한 서랍을 열어본 뒤 개켜진 옷을 하나하나 꺼냈다. 곧 바닥이 드러났다. 이번엔 시렁 위 평소 덮지 않는 이불을 내려 펼쳤다. 실패. 장판 아래도 들춰보았지만 허사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엄마는 평소 부엌에서 학교에 가는 자식들에게 필요한 돈을 주었다. 한낮인데도 부엌은 어두컴컴했다. 그릇들이 들어 있는 찬장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 접시들, 수저통…. 위 칸부터 아래 칸으로, 그릇들을 하나하나 들어 안을 확인했지만 1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동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엄마는 돈을 어디에다 숨겨놓았단 말인가. 찬장 뒤편 고방으로 들어갔다. 곡물들이 들어 있는 자루와 단지들을 들여다보았다. 자루에선 먼지만 풀풀 날렸고 단지엔 어둠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물론 엄마가 숨겨놓은 돈을 찾아낼 때도 드물지만 몇 번 있었다. 다 가져가진 않았다. 잡지를 살 돈만 훔쳤는데도 그 여파는 만만찮았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벗어놓은 옷에서 지폐를 찾았을 때는 너무 떨려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기분 좋은 날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이렇게 말했다. 엄마에게 달라고 해. 그 말을 전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돈 없어. 우울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다.

고향 집은 대문이 없다. 현관문도 잠그지 않는다. 그 사실을 지적했는데 부모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둑이 부잣집에 가지 여길 왜 오겠느냐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매일 집과 밭을 오가는 농부이다 보니 도리어 불편하다고 했다. 통장을 사용하긴 했는데 은행이 멀리 있었기에 부모님은 여전히 집안 곳곳에 각자의 돈과 귀중품을 감췄다. 부부임에도 서로가 모르는 곳에 숨겼는데 집이 넓어지고 장소가 다양해지자 가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장이나 농협에 가는 날 지갑과 통장을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엄마가 찬장 구석구석을, 또 어떤 날은 아버지가 침대나 장롱, 입었던 옷가지를 뒤지느라 바빴다. 심지어 아버지는 밖에 나가 가느다란 싸릿가지를 가져와 장롱과 침대 아래를 뒤적거렸다. 나는 쿠션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며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물론 지갑과 통장이 과연 어디에서 나올지 흥미진진 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혹시 집이 비었을 때 도둑이 든 건 아닐까, 걱정도 하며.

내 통장하고 지갑 못 봤어? 아버지가 엄마에게 물었다. 당신 통장을 내가 어떻게 봐요. 우리 집에 누가 왔다 간 거 아냐? 왔다 가긴 누가 왔다 가요! 지갑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대체 어디 간 거야? 당신이 알지 누가 알아요! 찾는 일을 포기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무척 서운했는데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아버지의 돈은 나타났다. 경운기의 공구 상자에서, 장롱 아래 가장 깊은 곳에서. 물론 엄마의 돈도. 그러면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공돈이 생겼네. 엄마의 말이다.

요즘 새삼 궁금하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은행에도 맡길 수 없는 수상한 돈을 어디에 숨겨둘까. 누구처럼 텃밭에다 묻어놓을까? 내게 그런 돈이 들어온다면? 옛날에 우리 엄마는 뜨거운 여름날 품팔이를 해서 번 돈을 비닐봉지에 꼭꼭 싸서 보리쌀이 담긴, 내 키보다 큰 쌀단지 속에 파묻어 놓았었다.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차마 그 돈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런데…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는 것 같다. 그게 뭘까?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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