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쌀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에너지원이다. 남아도는 쌀 처리를 놓고 논란이 이는 요즘이지만 한국사에서 쌀이 넉넉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첫 구절이다.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던 그 세월’에 대한 회한이다. 불과 반세기 전의 풍경이다. 그때만 해도 새하얀 쌀밥 한 그릇은 대단한 기쁨이자 사치였다.
한국인에게 쌀은 늘 부족했다. 해방 후에도 굶주린 이들이 넘쳤다. 그 허기의 세월을 단박에 돌려놓은 ‘기적의 볍씨’가 있었다. 바로 통일벼다.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름인데, 통일벼는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을 180도 돌려놓은 메가톤급 트리거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한복판에도 통일벼가 있었다.
71년 2월 5일, 청와대에서 쌀 신품종 IR667(통일벼) 품평회가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 각부 장관 등 40여 명이 모였다. 박 대통령은 밥 색깔은 ‘좋다’, 차진 정도는 ‘보통이다’, 밥맛은 ‘좋다’에 ‘○’표를 했다. 무기명 조사였으나 대통령이 서명까지 했다. 동석한 각료들도 “문제가 없다”고 거들었다. 밥맛이 좋지 않아 소비자들이 거의 찾지 않았던 통일벼가 70년대 녹색혁명을 일으킨 주역으로 떠오른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보다 한 달 전, 김학렬 부총리(경제기획원 장관)가 “누가 이 밥더러 밥맛이 없다고 하느냐. 배부른 사람들이구먼!”이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허문회 교수와 김인환 청장의 노력
통일벼 개발은 당대의 절박한 과제였다. 만성적인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안정적 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가 이집트에서 몰래 들여온 ‘희농(熙農) 1호’가 식량난 해결사로 주목받았으나 우리 풍토와 맞지 않아 완벽한 실패로 끝난 직후였다.
통일벼는 민(民)·관(官)·학(學) 세 박자가 어울린 결정체였다. 앞에서 이끈 게 지도자의 리더십이라면, 이를 뒷받침한 건 학계와 일선 공무원의 헌신이었다. 특히 두 명의 파이오니어가 있었다. 첫 번째 주인공은 허문회(1927~2010) 서울대 농대 교수다. IR667이란 한국 현대농업의 최고 성과를 일궜다.
IR667에서 영어 IR는 1960년 미국이 필리핀에 세운 비영리기관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앞글자를, 숫자 667은 667번째 교배를 통해 얻은 벼를 가리킨다. 64년부터 IRRI에서 만 2년간 연구한 이 교수는 IR92에서 시작해 IR1300까지 총 1209번의 조합을 만들어냈다(이완주의 『실록 통일벼』). 목표는 단 하나, 한국인의 배를 채워줄 다수확 품종 개발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통일벼 IR667이다. 1209번의 도전이 영근 결실이었다. 이후 IR667을 개량한 ‘유신’ 등 후속 품종이 잇따랐다.
통일벼의 탄생은 눈물과 피땀의 이중주였다. 한국에선 벼를 1년에 한 번밖에 심을 수 없기에 삼모작이 가능한 필리핀까지 신품종 볍씨를 비행기에 실어날렸다. 이른바 왕복 선발(Shuttle breeding)이다. 더욱 획기적인 성과는 불임 판정이 내려진, 즉 결실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인디카(동남아 일대 쌀) 계통과 자포니카(동북아 일대 쌀) 계통의 접목에 성공해 품질과 수확량 모두 우수한 전대미문의 품종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전까지 한국의 쌀은 자포니카 계통 일색이었다. 인디카 계통은 자포니카보다 미질(米質)이 떨어지는 대신 키가 작아 쉽게 쓰러지지 않고 이삭에 낟알이 많이 열리는 장점이 있다.
허 교수가 통일벼 모판을 마련했다면 김인환(1910~89) 농촌진흥청장은 모내기를 주도했다. 역대 최장수(12년)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 아래 통일벼 신화의 현장을 지켰다. 71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IR667은 이후 기후·풍토·질병 등의 난제를 이겨내며 쌀 자급자족 100%라는 지상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정부는 통일벼를 시장가격보다 높게 수매하고, 전국에 농촌지도원을 파견하며 통일벼 보급에 총력전을 펼쳤다.
통일벼의 성취는 놀랍다. 72년 10아르(1000㎡)당 일반벼 수확량은 321㎏인데 비해 통일벼는 386㎏에 달했다. 이듬해에는 481㎏으로 껑충 뛰었다. 통일벼 재배가 늘면서 전국 쌀 수확량도 75년 4.5%, 76년 11.9%, 77년 15.2%씩 급증했다. 74년 꿈의 3000만 석을 넘어선 지 3년 만인 77년 4000만 석을 돌파했다. 그해 전국 평균 수확량도 10아르당 494㎏으로, 일본의 종전 세계기록 447㎏을 경신했다. 정부는 76년 쌀 자급을 공식 선언했고, 77년에는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를 허용했다. 이른바 단군 이래 처음으로 보릿고개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통일벼의 성과는 농업에 그치지 않는다. 70~80년대 산업화를 떠받치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20세기 후반 한국호(號)를 움직인 연료를 공급했다. 일단 배가 든든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통일벼는 배고픔 해소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등공신이 됐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는 70년대의 ‘기술시스템’을 주목했다. 통일벼 증산체제는 행정·기술·사회적 요소의 종합이라는 뜻에서다. 그는 “정부 지원으로 농민들이 근대적 영농기법을 도입했고, 한국 농업 전체도 경제개발의 이륙(take-off) 단계에 견줄 만한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평가했다(『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의 해석은 더욱 적극적이다. 그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제조업 신화의 뒷면에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농공 병진정책이 있었다”며 “80년대 중반까지는 농업의 고용창출률이 공업보다 높았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농업의 압축성장이 먼저 이루어졌기에 제조업의 압축성장도 가능했다”고 진단했다(『당신이 모르는 진짜 농업경제 이야기』).
오르막이 가파르면 내리막도 급하다. 통일벼 전성시대는 급속하게 저물었다. 녹색혁명이란 엄청난 성취에도 80년대 이후 통일벼에 대한 수요가 급락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식탁의 서구화가 진행되면서도 쌀 소비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밥맛 좋은 쌀, 즉 쌀의 고급화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신품종 연구도 통일계 대신 ‘고품질 다수성’ 자포니카 계열로 빠르게 이동했다. 당국의 수매량도 해마다 쪼그라들며 90년대에 들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통일벼는 포니, 요즘 쌀은 제네시스” 하지만 통일벼의 유산은 막대하다. 70년대 ‘반짝스타’가 아닌 2000년대에도 통하는 ‘영원한 전설’쯤 된다. 통일벼에서 습득한 신품종 기술은 이후 계속 발전하며 21세기 한국 농업의 근간을 형성했다. 이주량 연구위원은 “통일벼가 포니 자동차, 64K D램이라면 지금 논에 심은 벼는 제네시스, 6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70년대 통일벼 녹색혁명은 80년대 백색혁명(비닐온실 원예농법)으로 이어졌다. 농업의 안정적 성장으로 다른 산업의 약진도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삼모작 국가이면서도 농업 선진화에 실패하면서 산업 고도화를 이루지 못한 필리핀과 대조적”이라고 설명했다.
쌀 걱정을 지워버린 요즘이지만 신품종 개발은 끊이지 않는다. 당면한 기후온난화가 가장 큰 변수다. 농촌진흥청 박현수 연구관은 “한반도의 아열대화가 진행되면서 최근에는 고온에 강한 신품종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통일벼 개발에 사용했던 인디카 품종에도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쌀은 최근 때아닌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이상기후로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쌀 한 가마가 4년 만에 22만원을 넘어섰다. 올해 일본도 쌀생산 감축정책에 따른 쌀값 폭등을 겪기도 했다. 식량안보와 식량자급률 제고라는 농업정책의 기본을 돌아보자는 목소리가 커진 상황이다. 그 중심에 쌀이 있다. 국가경제의 주축이 제조·서비스업으로 옮겨간 지 오래지만 쌀, 나아가 농업경쟁력 확보 또한 결코 방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2022년 현재 한국의 식량안보지수(영국 이코노미스트 조사)는 총 113개국 중 39위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