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밝힌 이른바 'END(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이니셔티브'는 북한이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 현실을 고려한 단계적 접근법이다. 다만 과거에도 비슷한 시도에서 결국 북한의 기만 등으로 비핵화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한 사례가 있다. END 이니셔티브가 마지막 단계인 비핵화까지 도달하려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보상 간 순서 조정 등 정밀한 조율을 통해 허들을 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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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허들, '최종 상태=비핵화' 합의
이재명 정부가 공식화한 북한의 '핵 활동 중단-감축-비핵화' 3단계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END 이니셔티브도 최종 단계는 비핵화로 설정했다. 관건은 북한 역시 이에 합의하게 하는 것이다.
트럼프 1기 때 북·미 정상회담이 결국 노 딜로 끝난 것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끝내 최종 상태(end state)가 비핵화라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계속 영변 핵시설 폐기만 주장했다. 이에 협상이 계속될 수록 미국은 북한이 하고자 하는 게 '북한 전역의 비핵화'가 아니라 '영변에 국한한 비핵화'라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대북 관여가 수년 째 중단되면서 북한의 핵 능력이 점차 고도화되고 있는 만큼 일단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 이를 멈추게 하는 걸 우선으로 보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비핵화는 엄중한 과제임에 틀림없지만,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종 상태에 대한 합의 없이 대화 재개 자체만 서두르다 보면 비핵화로 향하는 방향성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정은은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도 비핵화 협상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명확한 의제 설정은 지난하게 이어질 비핵화 마라톤의 승패를 가르는 열쇠"라며 "출발점으로써 북한 핵활동의 완전한 중단, 최종 상태로써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합의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보다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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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허들, 보상 전 실질적 비핵화 조치 담보
END 이니셔티브는 남북 교류 활성화, 북·미 혹은 북·일 수교 등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하는 구조로 보인다. '비핵화를 통한 북한의 정상화'와 '북한의 정상화를 통한 비핵화 견인' 중 무엇을 택할 것이냐는 오래된 질문에 후자를 택한 셈이다.
여기엔 전자를 택한 윤석열 정부의 대북 압박 정책이 오히려 북한의 핵 능력 증강으로 이어졌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초기 조치에 보상을 하지만, 북·미 수교 등은 맨 마지막 단계에 뒀다. 북한이 이에 전혀 호응하지 않은 데다 우크라이나전 파병 등으로 러시아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며 북핵 위협은 오히려 더 커진 게 사실이다.
문제는 END 이니셔티브가 구조상 선(先)보상-후(後)비핵화 구도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교류(E)가 이뤄지려면 제재가 완화돼야 하고, 북한이 미국이나 일본과 수교하는 건(N) 곧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런 보상을 챙긴 뒤 북한이 핵 개발에 다시 나선다면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과거 비핵화 협상에서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 시기와 순서는 가장 첨예한 이슈였다.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 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 전에 보상을 내놓으라는 노골적 요구다.
이에 대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뉴욕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E·N·D라는)세 가지 요소들은 각각의 하나의 과정으로서, 서로 간의 우선순위와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를 "포괄적 접근법"으로 설명했다. "남북 대화와 미·북 대화 등을 통해서 관계 정상화, 비핵화 과정이 서로서로 상호 추동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는 E-N-D를 순서대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보상이 먼저 제공되는 데 대한 우려에 선을 그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두느냐는 질문에는 "세 목표를 잘 조율해 움직여 가야 할 것"이라며 "한 쪽이 전혀 안 되고 다른 쪽이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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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허들, 한국의 핵협상 '당사자' 지위 확보
END 이니셔티브는 남북 교류 활성화가 한 축이지만,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는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남북 관계 발전을 추구하면서, 북·미 사이를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적극 지지하고 협력하겠다"면서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과는 차별화된 접근법으로, 북한이 지난해부터 '적대적 두 국가' 기조 하에 대남 단절 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페이스메이커'를 자청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국이 빠진 채 북·미만 참여하는 협상에는 한국의 안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스몰 딜'의 우려가 상존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 본토에 대한 위협만 제거하고 협상이 멈추는 상황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의 지분 확보가 필요한 만큼 일본과도 긴밀한 협력해 한·미·일이 함께 핵심 당사자로 참여해야 '코리아 패싱'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현재 한반도 역내 환경을 고려할 때 북·미 간에 협상이 이뤄질 경우 전세계가 주목하는 이벤트적인 성격이 부각될 것"이라며 "한국이 배제된 이벤트가 한반도의 구조적인 현실을 은폐하는 순간 무거운 부담과 비용이 담긴 청구서를 홀로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