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임금단체 협상(임단협)을 마무리한 국내 주요 대기업의 노사 협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특징이다. 정년 연장, 주 4.5일제 추진,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 도입 등 친(親) 노동 정책을 공약한 이재명 정부 바람을 타고 노동조합(노조)이 협상력을 키웠다.
24일 재계 10대 그룹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LG전자, 롯데케미칼, 포스코,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농협(금융노조), GS칼텍스 등 주요 계열사 10곳 중 롯데케미칼과 농협, GS칼텍스를 제외한 7곳이 이날까지 임단협을 마무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투(夏鬪)를 넘어 추투(秋鬪)까지 우려했지만, 추석 연휴를 앞두고 상당수가 협상을 타결했다.
진기록이 속출한 올해 임단협에서 두드러진 건 오랜만의 파업이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3일부터 사흘간 부분파업을 했다. 2018년 이후 7년 만의 파업이었다. 울산·아산·전주 공장 등 파업으로 약 4000억원가량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아직 임단협 중인 기아는 지난 19일 찬반 투표에서 파업을 가결했다.
HD현대중공업도 임단협 와중에 4차례 전면 파업, 11차례 부분 파업을 벌이는 등 ‘진통’을 겪었다. HD현대중공업 노조 지부장은 조선소 내 40m 높이 턴오버 크레인(선박 구조물을 뒤집는 크레인)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임금 5% 인상과 주4.5일제를 요구하는 금융노조는 26일 3년 만에 총파업을 예고했다. 금융노조는 이날 파업 선언문에서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이 끝내 구체적인 임금 인상안을 내놓지 않았다. 주 4.5일제와 관련해서는 논의조차 거부했다”며 “파업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실적 좋은 회사를 중심으로 성과급 인상 요구가 분출한 것도 특징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4일 임금 6% 인상과 성과급(PS) 상한선 폐지, 그리고 앞으로 매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합의안을 타결했다. 이번 합의로 SK하이닉스 직원들은 1인당 약 1억원 안팎의 성과급을 받을 전망이다.
호황을 맞은 HD현대중공업도 지난 22일 기본급 13만5000원 인상, 격려금 520만 원과 특별 인센티브 100%, HD현대미포 합병 축하금 120만 원 지급 등 협상안을 타결했다. HD현대 관계자는 “조합원 1인당 평균 2830만 원의 임금 인상 효과”라며 “역대 최대 혜택이자 경쟁사 대비 최고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노조가 ‘명분’을 내걸고 ‘실속’을 챙긴 점도 눈에 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HD현대, 한화오션 노조 등이 정년 연장, 임금피크제 폐지, 주 4.5일제 등 사용자 측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건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노사 협상에서 이를 타결한 경우는 없었다. 한 대기업 노조 간부는 “임단협에서 노조의 협상 전략은 10을 요구해 6을 얻어내는 것”이라며 “올해는 정년 연장, 주 4.5일제 도입 등 요구할 거리가 많았다. 회사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압박 카드’로 십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농협(금융노조)을 제외한 롯데케미칼·GS칼텍스 등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회사는 임단협을 이날까지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추석 연휴 이후 추투가 불가피하다.
최근 노사 협상을 타결한 한 대기업 임원은 “노동자 권리를 강조하는 현 정부가 출범한 뒤 노조 목소리가 커져서 협상이 더 어려웠다”며 “다만 노조가 정년 연장, 4.5일제 등 거대 담론보다 성과급과 복지 등 실리에 집중하는 경향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