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미성에 미남이어서 동네 사랑방에서 『심청전』을 읽으시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렸다. 나는 미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라 하면 눈물이 글썽거리자 그냥 들어가라 하셔서 들어왔다. 음악 성적은 늘 ‘미’였고 그래서 1등을 한 번도 못 해 봤다.
늦은 유학 시절에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괴로워하다 유학생 상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더니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 무렵 한참 유행이던 CD 가게에 가서 우선 플레이어를 하나 사고, 유학생인데 무슨 판을 사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내 처지를 들은 주인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고 했다. 들은 간은 있고, 바쿠닌(M. Bakunin·1814~1876·사진)의 유언이 생각나 그것을 사 기숙사에 와서 들어보니 그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겠더라.
바쿠닌은 제정 러시아의 귀족의 아들로, 농노가 1200명이었다. 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하고 황제 근위병으로 복무했다. 병역을 마친 그는 독일·프랑스·스위스를 여행하며, 자기의 조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자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바쿠닌은 185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동부 시베리아로 이송된 것을 계기로 일본으로 탈출하여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그는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 무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마르크스를 만났는데 늘 다투고 헤어졌다. 그는 스위스를 전전하다가 베른에서 죽었는데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세계도 사라지리라. 그러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한 음악을 들으라는 말뜻은 알겠는데, 아직도 바쿠닌의 유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