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중국의 시인 이백은 대중적으로는 이태백(李太白)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데, 태백은 자(字), 즉 성인이 되었을 때 성인으로 예우해서 부르기 위해 새로 짓는 이름이고 백(白)이 본명입니다. 제가 ‘8세기 중국의 시인 이백’이라는 말로 글을 시작했지만 이백은 중국 시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아시아 시인이기도 합니다.
중세의 동아시아 지역은 한자를 사용한 서면어(흔히 한문이라고 부르는)를 공유했고 그 서면어 문학을 대표하는 두 시인이 바로 이백과 두보(杜甫)입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일본·베트남의 중세 서면어 문학에서 이백과 두보는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적 존재였습니다.
학폭 처리에 반발한 시위 군중
공안의 과잉 진압, SNS로 퍼져
이백은 시 썼지만 협객 활동도
딱한 고향 풍경, 어찌 여겼을까
특히 이백의 경우에는 그가 종족적으로 순수 한족이 아니라 페르시아계나 투르크계 혼혈이었을 가능성이 크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는 제국의 모습을 가장 뚜렷이 나타낸 시대였습니다. 당나라를 개국한 황제 자신부터가 한족이 아니라 선비족 출신이었으며, 예컨대 반란을 일으켰던 절도사 안녹산은 페르시아계와 투르크계의 혼혈이었고, 수도 장안은 여러 종족의 혼재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폐쇄적 한족 중심주의와 반대되는 개방성이 당나라라는 중세 제국의 특성이었습니다.
이백의 출생지는 종래에는 사천성 면양의 강유(이곳에 이백기념관이 있습니다)라고 여겨져 왔지만 이제는 중앙아시아 지역 키르기스스탄의 수야브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강유로 이주했다는 설이 더 유력합니다. 당나라 시대의 수야브는 실크로드 상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서 당나라 안서도호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강유가 출생지는 아니더라도 유소년기를 보낸 곳이기는 하므로 이백의 고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강유라는 지명이 뉴스에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국립국어원에서 제정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장유라고 표기된 채로. 지나는 김에 이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약간의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말 발음으로는 강유(江油)이고, 중국어 발음부호로는 ‘jiangyou’라고 표기됩니다. jiangyou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쟝여우(혹은 쟝요우)가 됩니다. 여우(혹은 요우)를 ‘유’로 표기하는 것도 그다지 찬성하기 어렵지만, 쟝을 ‘장’으로 표기하는 데 대해 저는 강력히 반대합니다. 우리말의 한 음운 ‘ㅈ’이 중국어에서는 세 개의 음운(z·zh·j)으로 나뉘는데, z와 zh는 모음 ‘이’와 결합할 수 없고 j는 ‘이’나 ‘위’ 없이 ‘아’와 결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경우 jiang은 절대로 ‘장’이라고 표기될 수 없습니다. 우리말의 자세한 모음 표현 능력을 왜 일부러 죽이면서까지 ‘쟝’을 ‘장’이라고 표기하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강유가 뉴스에 오른 건 정치적 맥락에서였습니다. 학교폭력사건에 대한 공안(경찰)과 시정부(시청)의 처리 방식에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하자 공권력이 경찰 특수부대까지 동원하여 폭력 진압을 했고 그 장면을 SNS 영상을 통해 전 세계인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폭력 진압은 과잉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했으며 광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하필 강유는 이백의 고향인지라 저는 더욱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이백은 술과 달을 좋아하는 낭만적 시인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소년 시절에 검술을 높은 경지까지 익히며 협객 활동을 했고 심지어 그 활동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살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협객의 정의는 불공정한 일을 바로잡는 이타적 행위에 있는 것이지만 근대적 체계 속에서는 당연히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만년에는 당 현종의 12번째 아들인 영왕 이린의 군대에 막료로 참여했다가 반란군으로 지목된 영왕이 패전하고 처형되자 이백 또한 처형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안녹산의 난 중에 현종을 태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세 번째 아들인 황태자 이형이 황제로 즉위했는데, 영왕 이린은 강남 지역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당나라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다시 한번 남북조시대를 맞이했겠죠.
강유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이백이 이번 강유 사태를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이백이 40대 초반의 나이로 황제의 명을 받아 입궁했을 때 정치적 실세인 환관 고역사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라고 술주정을 한, 혹은 술주정인 척한 일화가 상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