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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현의 시선] 북핵 6자 회담의 추억

중앙일보

2025.09.24 08:22 2025.09.2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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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현 논설위원
이재명 정부가 ‘중단-축소-폐기’로 이어지는 3단계 북한 비핵화를 꺼내 들었다.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방미하기 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은 “비핵화를 향해 결실 없는 노력을 고집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해 일부라도 달성할 것인지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비핵화 불가’ 원칙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야심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내놓은 해법은 어떻게든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막겠다는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 3단계 비핵화 제시
6자 회담식 해법과 유사해
북·미가 호응할지는 불투명

3단계 비핵화론은 6자 회담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장장 6년을 끌어온 6자 회담의 기본 틀은 북한 핵시설의 ‘동결-불능화-폐기’였다. 단계적 이행이었고, 상호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참가국들은 9·19 공동성명(2005년 4차 회담)을 통해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실천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 불능화, 폐기할 때마다 대북 에너지·경제 지원,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의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번 해법도 북한이 핵·미사일 중단, 축소, 폐기(비핵화) 단계를 이행할 때마다 보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6자 회담은 2009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상호 불신의 늪을 건너지 못하고 끝내 좌초됐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동결과 불능화의 대상이 되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는 부실했고, 깐깐한 ‘검증’ 요구에 비협조적이었다. ‘신고’와 ‘검증’의 문턱은 높았다.

‘진실의 순간’이 오자 북한은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와 2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국제사회는 유엔 대북 제재 결의로 맞섰다. 이에 북한은 존재 자체를 부인해온 고농축 우라늄(HEU) 핵 개발을 공식 선언하면서 6자 회담의 무대를 박차고 나갔다. 2009년 7월 유엔 주재 북한대사의 “6자 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말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이 대통령의 3단계 비핵화론을 놓고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의 6자 회담을 떠올리지 않았나 싶다. 김 위원장이 최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우리의 무장 해제를 꿈꾸던 전임자들의 ‘숙제장’에서 옮겨 베껴온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으니 말이다.

김 위원장은 대못도 박았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미의 궁극적 목표”라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말을 콕 집어 “우리 체제나 헌법을 전면 부정하는 망발”이라고 비난했다. 핵 무장을 헌법에 명기한 만큼 ‘비핵화=위헌’이란 논리를 편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위 실장은 6자 회담이 막을 내린 2009년 당시 6자 회담 수석대표였다.

미국 쪽 사정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위 실장은 “한·미 사이에 논의했고, 대체로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문 부호는 남아 있다. 미국의 북핵 협상가들 사이에선 ‘죽은 말을 다시 사지(buy the same dead horse again) 않는다’는 말이 금과옥조다. 합의 후 보상만 챙기고 약속을 깨는 북한의 협상 전술에 더이상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단계적 접근방식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1기 때도 그랬다. 결국 ‘노딜’로 끝난 2019년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에 핵·미사일 신고를 요구했다. 김 위원장이 공격 타깃을 내놓으라는 것이냐며 버티면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해제 카드를 제안하자,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한 플러스 알파를 내놓으라고 했다. ‘중단’ 과정을 생략한 ‘폐기’와 ‘보상’의 맞교환이었다.

‘피스 메이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번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접근법이 바뀌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6자 회담의 또 다른 참가국이었던 중국과 러시아 역시 예전만큼 비핵화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최근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서 확인됐듯이 세 나라는 역대급 밀착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핵보유국으로서 과거 미국과 함께 비확산 체제의 수호자였던 중·러는 미·중 전략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시대를 맞아 입장이 달라졌다.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러시아)하거나, 핵 무장한 북한을 미국을 견제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중국)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남북 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 북·미 대화를 독려하고 있다. 한국에 이익이 된다고 했다. 실용적인 접근이다. 그러나 중단-축소-폐기의 3단계 비핵화는 30여 년째 이어진 북핵 협상의 역사를 볼 때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 같다.





차세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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