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시장의 비극은 그 협소함에서 비롯된다. 5000만 명이라는 인구 규모는 선진국 중에서 가장 작은 노동시장이다. 반도의 북쪽이 막혀 있기 때문에, 한국은 지리적으로 갇혀 있는 섬나라다. 협소하다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직장 외 다른 옵션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협소한 선택지의 막다른 길은 종종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결사적으로 현 직장을 사수하는 것이다. “밖은 지옥”이니까.
반면에 일본은 1억2000만 명, 중국은 14억 명의 인구가 받쳐주는 노동시장이다. 대만은 이념으로 나뉘어 있을지언정 노동시장은 사실상 중국본토와 연결돼 있다. 서유럽과 영연방 국가들은 단일 노동시장과 동일한 언어권으로 묶여 있다.
적은 일자리가 청년 좌절 키워
기업은 해고 비용 커 채용 꺼려
일·대만과 노동시장 통합이 해법
법·제도 정비하면 장벽 극복 가능
협소한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은 낭떠러지로 밀리지 않으려 싸웠고, 커진 해고의 비용 때문에 기업은 신입 채용을 꺼린다. 대기업-정규직-노동조합으로 제도화된 상층 노동시장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한편으로는 노동운동 덕분에,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 대기업들의 선전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호봉제 임금 구조의 최상단에 올라 있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과 기업조직은 역삼각형 구조를 띠게 되었고, 그 불균형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청년들은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진입을 위해 유년과 젊은 시절을 갈아 넣는다.
이 경직적이고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상층 노동시장을 유연화할 수 있을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가 완화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하방 인력 교류가 더 확대될 수는 없을까? 해결될 기미가 없는 이 질문들을 잠시 괄호로 묶고 다른 대안을 고려해 보자. 바로 노동시장의 공간적 확대 전략이다. 한국-대만-일본의 노동시장을 통합해 1억9000만 명, 한국 노동시장의 4배에 가까운 규모의 노동시장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반론들이 쏟아질 것이다. 3국은 정치적 반감, 언어·지리적 장벽, 산업 간 임금 격차, 노동시장 제도 차이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말이다.
사실 동아시아 3국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자·쌀 경작·유교 문화권을 공유하며 40년 이상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해 왔고, 북·중·러 권위주의 동맹과 맞서 있다. 일본은 지역 맹주로서 동맹이 필요하고, 대만은 중국 경제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같은 편이 필요하다. 대만·일본 청년들은 한국의 고임금 일자리를, 한국·대만 청년들은 일본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노동시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3국 노동시장 통합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노동시장 통합이 생산물 시장의 경제통합으로 이어지면 3국의 자본은 협력과 투자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커진 노동시장은 개인에게 탈출구를 제공한다. 세 나라에 동일한 직종과 산업에 경쟁 기업이 많다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이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유사한 일을 하며 동등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복수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이닉스를 떠난 노동자가 삼성전자, 도쿄일렉트론, TSMC 등 3국 기업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 안전망 역할을 한다.
물론 국경·언어·문화·제도 장벽은 넘기 어려워 보이는 걸림돌이다. 하지만 한 국가에서 납입한 연금 기록이 다른 국가에서 불이익 없이 인정받고, 비슷한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소득과 자산의 운영에서도 내외국인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가 보장된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개인들은 이직에 대비해 관련 컨퍼런스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잠재적 고용주와의 접점들을 넓히고, 회사 안팎의 네트워크들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기업들은 외국 인재 정착 프로그램을 통해 스카우트를 늘릴 것이다. 인재가 빠져나가는 만큼 다른 인재들이 유입되고, 노동과 자본은 더 나은 보상과 규제 없는 환경을 찾아 이동하며, 새로운 노동-자본 관계의 균형점들이 찾아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은 인재를 확보하고, 그러지 못한 산업은 도태될 것이다. 기업은 구조조정을 거치고, 개인은 높아진 이동성으로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아 혁신이 촉진될 것이다.
3국의 노동시장 통합이 생산·소비 시장 통합으로 이어지면, 수출 중심 경제를 내수 중심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블록화되는 세계 경제 속에서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분절화된 1차(대기업·정규직)와 2차(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시장의 해체를 앞당길 것이다. 동시에, 이는 단순한 경제연대를 넘어, 동아시아 민주주의 3국의 지정학적·전략적 연대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개인에게 엑시트 옵션(exit option)이 존재하지 않으면 적당한 임금을 받아도 갈 곳 없는 종속 상태지만, 다수의 옵션이 있는 세계에서 그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과 조직을 찾아 현장 경험과 스킬을 쌓으며 혁신을 추구할 것이다. 노동자의 엑시트 옵션이 많은 사회에서 혁신의 가능성이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