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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그린란드의 아픈 역사 '강제 피임'

연합뉴스

2025.09.2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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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그린란드의 아픈 역사 '강제 피임'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자, 북극권의 광활한 영토를 자랑한다. 자원마저 풍부한 '기회의 땅'으로 알려져 강대국들이 늘 눈독을 들인다. 지리적으로는 북미 대륙에 인접해 있지만 지금까지 북유럽의 덴마크 자치령으로 남아 있다. 그린란드는 북유럽에서 거리로 따지자면 오히려 노르웨이가 더 가까운데 어떻게 덴마크 땅이 됐을까. 유럽 국가들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린란드 땅을 발견한 사람은 바이킹 시대인 10세기 말 노르웨이 탐험가 에릭 더 레드다. 그는 대부분 빙하인 그린란드에서 그나마 초목이 자라는 남쪽 지역에 정착하면서 그 땅에 'Green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더 많은 이주민을 끌어모으려고 일부러 '녹색의 땅'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138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연합 왕국을 형성하면서 노르웨이 속령이던 그린란드도 자연스럽게 덴마크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1721년 덴마크 선교사 한스 에게데가 그린란드 탐험에 나선 것을 계기로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식민지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후 나폴레옹전쟁 결과 1814년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이 해체되면서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합병됐고, 그린란드는 덴마크 영토로 남게 됐다. 1953년에는 덴마크가 헌법을 개정해 그린란드를 식민지가 아닌 공식 영토로 만들었다.

서구인들에게 그린란드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 그 땅에는 원주민, 이누이트족이 살고 있었다. 이누이트족은 약 4천년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린란드 주민의 조상은 기원후 1100년 전후로 정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그린란드 인구 약 5만7천명의 약 80∼90%가 원주민이다.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공식 영토로 편입한 후 원주민들을 '덴마크화'하는 식민지 동화 정책을 꾸준히 펼쳤다. 그 과정에서 여타 식민지 역사처럼 수많은 인권 침해와 차별 행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게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강제 피임 사업이다. 덴마크는 1960년대 후반부터 30여년간 그린란드 인구 증가를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약 4천500명의 이누이트 여성에게 사전 설명이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자궁 내 피임장치(IUD) 삽입 시술을 했다. 당시 그린란드 여성 인구는 약 9천명에 불과해 전체 여성의 절반가량이 피해를 본 셈이다. 피해자 중에는 12살 소녀도 포함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사건은 강제 피임 피해를 본 그린란드 여성 143명이 지난해 덴마크 정부를 상대로 약 1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공론화됐다. 이 아픈 역사는 덴마크와 그린란드 관계 개선에 큰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가 24일(현지시간) 그린란드 수도 누크를 방문해 강제 피임 피해자들에게 공식으로 사과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그린란드인이라는 이유로 여러분들에게 가한 잘못된 일에 대해 사죄를 드린다"고 밝혔다. 덴마크 정부는 앞서 지난달 공식 사과 성명을 냈고 이날 총리가 직접 피해자들을 찾은 것이다. 피해자들은 총리의 발언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 피해자는 인터뷰에서 사과를 직접 듣는 것이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너무 중요했다면서 "이제는 증오나 분노,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갉아먹도록 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린란드는 2009년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자치권을 덴마크로부터 이양받았다. 다만 아직 경제적으로 덴마크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선뜻 독립을 선언하지 못한다. 그린란드 전체 예산의 절반가량이 덴마크 정부의 보조금이다. 그런데 올해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미국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독립 문제에 새 변수가 생겼다. 덴마크는 관계 개선을 위해 그린란드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됐고, 이번 과거사 사과도 그 연장선상으로 봐야 한다. 이런 게 '트럼프 효과'라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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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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