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10시쯤 경북 경주시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APEC 2025 KOREA’라고 적힌 하트 모양 조형물을 바라보며 출입구로 들어서자 금빛 동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이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주관하는 모습을 재현한 구조물이었다. 다음 달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위해 만든 건 아니지만, APEC 기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신라는 국가 주요 사안을 귀족들이 참여한 화백회의에서 결정했는데, 만장일치제가 원칙이었다. 21개 회원국의 의견을 모두 존중, 만장일치로 공동 선언문을 내놓는 걸 미덕의 관행으로 유지해온 APEC 정상회의의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상회의가 35일 앞으로 다가온 이 날 HICO 내부는 막바지 리모델링 작업으로 분주했다. 3층 건물인 컨벤션 센터(연면적 3만1872㎡)를 정상회의에 걸맞게 개조하는 작업이었다. 방한할 국가 정상을 수행할 실무진이 쓸 1층 전시홀 주변은 의자가 겹겹이 쌓여 산을 이뤘다. 한편에선 시저 리프트를 탄 작업자들이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채우고 있었다.
회의 당일 각국 정상의 동선은 철저한 보안이 유지돼야 하는 기밀 사안. 사전 노출을 막기 위해 2층과 3층으로 향하는 길은 통제됐다. 임경훈 APEC 준비기획단 기획총괄부장은 “현재 공정률은 95% 수준”이라며 “다음 달 2층과 3층에 회의·음향 시설을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서측 출입구로 연결된 HICO 외곽은 국제미디어센터(IMC)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전모를 쓰고 흙길을 건너 내부로 들어서자 천장 정비에서 나는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IMC는 정상회의 취재진을 지원하기 위한 6000㎡ 규모의 가건물이다. 지난해 페루 APEC 정상회의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3000명 이상의 다국적 취재진이 경주를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IMC 1층엔 약 440명이 앉을 수 있는 브리핑 홀이 들어선다. 정상회의 관련 영상이 대형 스크린으로 실시간 송출된다.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브리핑룸도 3곳 만든다. 회의 뒤 각국 인사가 언론 브리핑을 위해 이용할 공간이다.
2층엔 200여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과 개별 인터뷰를 위한 부스도 들어선다. APEC 준비기획단 관계자는 “공사를 마치고 하자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며 “다음 달 중순부터 내부 구조물을 갖추고 20일부터 시운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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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장 변경으로 혼선도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축 건축물과 우양미술관은 정상 배우자 만찬 등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국립경주박물관 중정엔 최근까지 정상회의 만찬을 위한 2000㎡ 규모의 한옥 건물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APEC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지난 19일 민찬장을 라한호텔 대연회장으로 바꾸기로 했다. 보다 많은 인사를 초청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부에 조리시설과 화장실이 갖춰져 있지 않은 점 등이 장소 변경의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기존 만찬장 건립엔 72억원이 들었고, 새 만찬장인 호텔 정비에도 23억원이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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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국 대부분 정상이 참여
참가국 대표단은 경주 보문단지에 숙소를 두지만, 일부 국가는 서울과 부산에 별도 숙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방한을 예고한 미국과 중국 정상이 경주가 아닌 곳에서 회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21개국 대부분 정상이 방한하는데, 일부 국가는 정상급 인사가 대신 참석할 수 있다. 지난해 리마 APEC 정상회의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이 불참했다.
크렘린궁은 지난 11일(현지시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APEC 정상회의 참석 여부가 결정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계속되고 있고, 북·러 간 불법 군사협력이 가속화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푸틴이 한국을 찾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외교부 관계자는 “각국 정상의 최종 참석 여부는 회의를 앞두고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용기와 특별기를 보유한 국가들은 김해공항으로 입국한다. 민항기를 이용할 경우 인천으로 들어온 뒤 국내 비행편이나 KTX를 이용해 경주로 이동할 전망이다.
외교가에선 한국 정부가 정상회의의 결과물인 이른바 ‘경주선언’을 도출하기까지 난관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함께하되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며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두 진영 대립의 최전선에 서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교류와 협력의 가교”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면서다.
하지만 미·중은 APEC을 자국의 통상 전략을 부각하는 무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에 맞서 중국은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 협력과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병행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에 종언을 고한 뒤 내세운 ‘가교 외교’의 본격 시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