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연의 마지막 순간에 김고은 배우가 “상연아, 사랑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 화답하고 싶었다. "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지현(30)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12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중과 상연’에서 천상연을 연기했다. 상연은 10대부터 은중(김고은)과 관계를 쌓아오다 20·30대엔 은중에게 상처를 주고, 40대에 조력사망을 택하며 다시 은중을 찾는 인물.
그런 상연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키는 건 류은중이다. 박지현 배우에게 “만약 상연의 옆에 본인이 앉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묻자, 그는 고민하다 김고은(34) 배우와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박 배우는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을 연기할 때, 눈이 감기고 입이 열리지 않는데 귀는 열려있는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작품에 다 담기진 않았지만, 김고은 배우가 ‘상연아 숨 쉬어’ 하다가 상연이를 부르며 울었다. 마지막엔 ‘상연아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때 나도 답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상연의 입장에선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박지현은 이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15부작 드라마인 ‘은중과 상연’은 공개 초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김고은, 박지현 배우의 연기가 대단하다는 시청자들의 후기가 입소문을 탔다. 그렇게 공개 일주일 만에 넷플릭스 한국 시리즈 1위를 차지했다.
김고은 배우는 영화 ‘은교’(2012)로 데뷔한 13년 차 배우. 드라마 ‘도깨비’(2016~2017), ‘작은 아씨들’(2022), 영화 ‘차이나타운’(2015), ‘파묘’(2024) 등 20여 개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보여주는 뛰어난 연기력에 ‘장르가 김고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두 배우가 작품에서 인연을 맺은 건 ‘유미의 세포들’(2021)이 처음이다. 박지현은 2017년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로 데뷔, 공포영화 ‘곤지암’(2018)으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오르며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에서 클래식 학도 이정경을 연기하고 ‘유미와 세포들’(2021), ‘재벌집 막내아들’(2022) 등에선 조연으로 활약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에게 천상연을 권했던 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연출이었던 조영민 감독. 지난 5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조 감독은 “감정의 폭이 큰 천상연이라는 인물을 ‘브람스…’에서 이정경을 연기한 박지현 배우가 맡으면 잘해낼 것 같았다”며 캐스팅 계기를 밝혔다.
박지현 배우는 “조 감독은 인물의 섬세한 눈짓이나 헛기침, 미묘한 감정표현을 잘 담아내는 섬세한 감독”이라며 “나 역시 작품을 볼 때 그런 섬세한 면을 캐치하는 걸 좋아해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Q : 천상연은 특유의 방어적인 성격과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경험 때문에 ‘빌런’이라고 오해받을 만한 면이 있다.
A : “대본이나 인물을 읽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모든 행동엔 정당성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 중에서 악에 속하거나, 미운 행동이어도 그렇다. 배우이기 때문에 상연이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박지현 배우는 상연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상연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은중을 질투하고 선망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며 “부러움을 인정할 수 있는 태도는 나와 닮은 면이 있다”고 봤다. 이어 그는 “상연은 모든 면을 숨기려 드는데, 나는 지나치게 솔직할 때도 있다. 그런 면이 달랐다”고 했다.
Q : 한국에서 조력사망은 불법이다. 이를 직접 제안하고 행하는 상연을 연기하려면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다.
A : “아버지가 크게 아프셨던 적이 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아픔에 파묻혀서 가끔 죽음을 원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때 잠시 조력사망이라는 단어가 스쳐갔다. 그 후로 ‘은중과 상연’ 대본이 나에게 왔고, 조력사망에 대해 더 생각해야 했다.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공부했다.”
Q : 제작발표회에서 조력사망 장면을 이야기할 때, 김고은 배우가 울더라. 현장에서 본인도 많이 힘들었나.
A : “현장에선 내가 더 많이 울었다. 극 후반부 상연의 덤덤한 태도를 연기해야 했을 때도 그랬다. 사랑과 결핍이 은중으로부터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고, 은중에게 용서받은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시청자 중 누군가가 ‘김고은이 펼쳐놓은 무한한 무대에서 박지현이 날뛸 수 있었다’고 적은 후기를 읽었는데 깊은 공감을 했다. 김고은 배우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래서 미안하고 감사하다. 연기 칭찬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건 다 김고은 배우 것이라 생각한다.”
김고은 배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박지현 배우는 유독 눈물을 보였다. “아직까지 마음에 상연이 남아있다”고 말한 그는 “이 작품을 찍은 후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했다. 잘 죽을 수 있는 삶이야말로 잘 살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은중과 상연’을 찍은 후 죽음이란 것을 마냥 멀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코미디. “언제나 코미디 연기에 관심이 많다”는 그는 이미 코미디 영화를 찍어뒀다고 했다. “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