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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의 시선] 금 오후 은행 문 닫자는 금융노조의 과속

중앙일보

2025.09.25 08:16 2025.09.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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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논설위원
네덜란드는 지난해 근로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이 144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7번째로 적었다. 지난 2010년 연간 노동시간이 1437시간으로 지난해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현 수준의 노동시간이 상당 기간 이어져 왔다는 얘기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법으로 주 4일제나 주 4.5일제를 강제하지 않는다. 유연근무법에 따라 근로자는 회사에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늘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파트타임 근무 비중이 높은 편이다.

주 4.5일제 선도하겠다며 파업
노동시간 단축엔 다양한 방법
전면 휴무보다 유연 근무 먼저
전화 상담시간을 명시하고 있는 네덜란드 국세청 홈페이지(위쪽)와 한국 국세청 홈페이지. [각 홈페이지 캡처]

한국(1865시간)보다 연간 400시간 이상 덜 일하는 네덜란드는 과연 공공 서비스 시간이 어떻게 될까. 네덜란드 국세청 홈페이지에 나온 전화 상담시간을 보자. 월~목 오전 8시~오후 8시, 금요일만 오전 8시~오후 5시다. 한국 국세청의 국세상담센터 전화(126) 운영시간(평일 오전 9시~오후 6시)보다 길다. 암스테르담시청의 시티데스크(민원 창구) 운영시간을 보면 월·화·수·금요일은 오전 9시~오후 5시이고, 목요일은 오후 8시까지다. 서울시 민원실 운영시간이 오전 9시~오후 6시이니, 비슷하거나 조금 짧은 수준이다.

은행 영업시간은 이보다 길다. ING은행 암스테르담 지점의 영업시간은 월~금 오전 10시~오후 6시가 많았다. 토요일 여는 곳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네덜란드의 근로자들이 과중한 노동을 할 리는 없다. 직원들의 필요와 다양한 생활 패턴에 맞게 파트타임 근무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공공 서비스 시간을 한국 못지않게, 혹은 더 길게 유지한다.

그런데 한국의 금융노조는 금요일 오후 휴무를 통한 주 4.5일제 시행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오늘(26일)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금융노조는 과거 은행권이 앞장서서 주 5일제를 이끌었듯이 주 4.5일제도 선도하겠다고 한다. 그것도 금요일 오후를 쉬는 방법으로 말이다. 이 주장은 노동시간 단축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근로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집단이 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지난 2002년 은행이 주 5일제를 도입할 때는 대부분의 선진국이 채택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공공부문과 은행, 민간이 금요일 오후를 토요일처럼 쉬는 주 4.5일제를 전면 채택한 OECD 회원국이 대체 어디 있는가. 이슬람교 휴일인 금·토요일을 서구식인 토·일요일로 바꾸면서 금요일을 오전만 근무하는 아랍에미리트(UAE) 정도만 있을 뿐이다.

물론 선진국에서 다양한 주 4일제 실험을 하고 있고, 일부 기업이나 공공부문에서 이를 채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몇몇 사례를 내세워 주 4일제가 대세라고 주장하는 것은 섣부르다. 일부 기업이 아니라 그 나라 근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제조업이나 대면 서비스업에선 주 4일제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독일은 지난해 연간 노동시간이 1331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적은 나라다. 노동계에선 이를 단축하자고 주장하지만, 너무 적게 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 자동차 업계가 경쟁력 저하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가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임금은 높게 유지됐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5월 집권 기독교민주연합(CDU) 행사에서 “이 나라에서는 더 많이, 그리고 무엇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해야 한다”며 “주 4일제와 일과 삶의 균형만으로 국가의 번영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방송인 박명수가 “열심히 살아서 지금이 있는 것이다. 인구도 없는데 이것(노동시간)까지 줄이면 어떡하냐”며 주 4.5일제를 걱정했는데, 이런 우려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전국 금융산업노동조합원들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9.26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은 기업들의 자발적 실험이 시작되는 단계다. 격주 4일제를 하는 기업도 있고, 주 32시간제를 도입한 곳도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반드시 주 4.5일제, 그것도 금요일 오후에 일괄 휴무하는 방식으로 추진할 이유가 없다. 영업시간을 유지하면서 근무 유연화를 통해 노동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많은 선진국이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지금 금융노조가 금요일 오후 휴무를 들고나온 것은 급발진에 과속까지 하려는 것이다.

설령 장래에 한국 사회가 주 4.5일이나 주 4일제로 이행하더라도 은행과 공공서비스 부문이 맨 마지막에 시행하는 것이 온당하다. 핵심 사회 인프라에 해당하는 서비스가 가급적 길게 돌아가야 일반 근로자가 워라밸을 추구하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런 의무를 방기하고 자신들이 가장 먼저 수혜자가 되겠다고 하는 주장은 무책임의 극치다.





김원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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