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는 눈밖에 없는 사람이지. 그런데 세상에, 그 눈이 엄청난 눈이야!” 세잔이 모네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둘은 한 살 차이였고 서로 깊이 존경했다. 모네도 세잔을 두고 “우리 전부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했으니 말이다.
모네에 대한 세잔의 평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용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 조금 소름 끼치는 데가 있다. 마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모네의 예술과 인생, 그리고 그 이후의 영향력까지 꿰뚫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눈밖에 없는 사람” 칭찬
모네의 예술 꿰뚫은 절묘한 예견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고드름 매단 채 겨울에도 야외 작업
아내 죽었을 때도 죽음의 색조 관찰
말년에 시골 정착, 수련 그림 쏟아내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모네는 인상주의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화가였고 인상주의는 인간의 시각 경험 자체를 중시한 사조였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캐치프레이즈였다. 두 번째 이유는 모네가 실제로 말년에 백내장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화풍의 변화가 결과적으로는 추상 미술의 전개에 영향을 끼쳤으니 사실상 엄청난 눈인 것이다.
15세에 캐리커처로 용돈 벌어 1840년생인 모네는 노르망디의 항구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학교에서는 공부는 뒷전이고 선생님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며 인기를 끌었다. 15세에는 동네에서도 유명해져 용돈을 벌 정도였다. 매주 일요일, 동네 표구점 쇼윈도에 모네가 그린 캐리커처가 걸리면 동네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한바탕 웃고 갔다고 한다.
이런 모네에게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풍경화를 그려보라고 충고한 어른이 나타났다. 같은 지역 출신으로 평생 바다 풍경을 그린 외젠 부댕이다. 부댕은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야외 사생을 시작한 화가 중 하나였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부댕은 17세의 모네를 바닷가로 데려가 함께 그림을 그렸다. 탁 트인 바다 앞에서 변화무쌍한 빛을 포착하는 연습을 하면서 모네는 완전히 새로운 그림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모네는 훗날 자신의 성공은 모두 부댕 덕분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부댕은 제대로 보고 이해하는 법을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파리의 미술대학에 입학한 모네는 이곳에서 피사로·르누아르 등 평생의 동지를 만났다. 이들은 야외 사생을 함께 다니며 새로운 예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삶은 쉽지 않았다. 27세에는 자신의 모델이었던 카미유와 사랑에 빠져 첫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예 재정 지원을 끊어버렸다. 세 식구는 단칸방을 전전했고 모네는 르누아르·세잔 등에게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며 도움을 호소했다. 채권자들에게 쫓기며 이사를 다니고 그림을 뺏기기도 했다. 30세 무렵에는 보불 전쟁 징병을 피하기 위해 런던·네덜란드 등으로 거주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모네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부댕의 가르침대로 가능하면 야외에서 작업을 했다. 겨울에는 코트를 세 벌씩 껴입고 수염에 기다란 고드름을 매단 채 작업하는 모습으로 목격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 속에서 붓질은 빠르고 대담해졌다.
1874년, 모네는 나이 34세에 미술사를 바꿔놓을 기념비적 전시를 조직했다.
당시는 ‘파리 살롱’이라 불리는 국가 공인 전시회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화가들의 데뷔와 성공을 결정하는 시대였다. 살롱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작품을 선별했고, 유럽 전체가 주목하는 큰 행사였다.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여 좋은 평을 얻으면 화가로서의 출세가 보장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미 200년의 역사를 가진 살롱은 취향이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역사화·초상화 등의 전통적 주제, 그리고 원근법과 명암법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화풍이 주류였다.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표현하려는 젊은 화가들은 번번이 외면당했다.
살롱에 반기, 미술사 흐름 완전히 바꿔 모네는 살롱 낙선을 거듭하던 동료들과 함께 ‘무명의 예술가 협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르누아르·피사로·세잔·드가 등이 멤버였다. 이들은 살롱 출품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적인 전시를 기획했다. 야외 풍경과 동시대의 삶을 소재로 한 출품작들은 당시로써는 급진적이었다.
31명의 화가가 참가한 이 전시는 인상파의 첫 번째 전시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거론되는 마네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살롱 내부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시는 평단의 혹평과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상파는 이후 10여년 간 여러 차례 전시를 개최하면서 미술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모네가 이 첫 번째 인상파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 바로 ‘인상, 해돋이’이다. 꼼꼼하고 매끄럽게 그린 그림을 최고로 치던 시대였으니, 한 비평가가 “갓 만든 벽지가 저 바다 풍경보다 완성도가 높다”며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이 혹평을 계기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에, 모네의 화풍은 ‘사실주의’라고도 불렸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예술가 집단을 ‘사실주의자들’이라고 칭했다. 졸라는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를 표현하고 실제 경험을 힘차고 생동감 있게 나타낸다”면서 이 그룹의 리더로 모네를 지목했다.
실제로 모네가 지향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눈으로 본 장면을 최대한 그대로 화폭에 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체 고유의 색이 아니라 빛에 반사된 색을 그린다는 과학적 접근법이 토대가 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야외 사생을 가능케 한 튜브형 물감의 발명, 광학과 사진 기술의 발전이 인상주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
모네는 평생 인상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며 강박적으로 색채와 빛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가 39세가 되던 해에는 아내 카미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 아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당시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는 커다란 슬픔 앞에서도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아내의 얼굴에 죽음이 드리운 색조의 변화를 파악하고 있더라는 자조적 내용이 담겨 있다.
마흔 중반에는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했는데 이때부터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다. 그는 원예 기술을 익히고 그림을 구상하듯 정원을 꾸몄다. “돈을 버는 족족 정원에 들어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9세부터였다. 이 무렵 그는 미국에서도 화가들이 찾아올 정도로 성공한 대가였지만 수련을 그리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수초를 그려내는 것은 정말 미치도록 어려운 일이다.” 그는 스스로도 강박이 된 것 같다고 인정하며 죽기 직전까지 수련을 그렸다.
화면 전체에 수면을 담은 모네의 그림은 당시로써는 혁신이었다. 보통 풍경화라고 하면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소실점이 드러나야 한다는 전통적인 규칙들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수면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안에 누워 눈높이에서 수련을 관찰하기도 했다. “다른 어떤 예술가도 시도한 적 없는 작품”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모네는 250여 점의 수련 그림을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수련이 있는 연못’은 1917~1920년 작이다.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1911년에는 두 번째 아내가, 1914년에는 첫째 아들이 사망했다. 막내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백내장으로 시력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팔레트에 물감을 짜놓은 순서를 외워서 그려야 할 정도였다. 이 시기의 모네는 자신의 시력을 믿을 수 없어 수년에 걸쳐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가끔씩 극도로 예민해져 그림을 찢어버리는 바람에 친구들이 일단 완성된 그림은 벽 쪽으로 돌려놓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백내장의 영향 하에 그려진 말년의 작품들은 형상이 무너지면서 결과적으로 추상미술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
“그림은 삶의 강박이고 기쁨이자 고통” 모네가 30대에 그린 ‘해돋이’와 70대의 ‘수련’ 연작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해돋이’는 미완성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작가는 이게 바로 완성된 그림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수련’은 남들 눈에는 다 그린 것 같은데 스스로가 확신을 갖지 못해 수년간 수정을 거듭했다. 찰나의 빛을 자신 있게 포착하던 화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기나긴 시간을 쌓아 올리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모네가 눈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세잔의 표현은 실로 절묘하다. 그에게는 평생 그림이 전부였다. 모네의 삶을 보면 “그림은 내 삶의 강박이고 기쁨이자 고통”이라는 그의 고백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100여 년 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젊은 날의 확신과 노년의 불안, 인생의 온갖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겪어낸 기나긴 시간들이 그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