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5일 오후 2시쯤 경기도 광주시에서 112 신고가 접수됐다. “3번 국도를 걸어가는 할머니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긴급 출동해 79세 여성 김모씨를 집으로 보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연일 각기 다른 운전자에게서 112 신고가 이어졌다. “3번 국도 중앙분리대 가운데 할머니가 서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지난달 20일 오전 4시쯤에는 “도로에 할머니가 있어 차로 칠 뻔했다”는 운전자 전화가 걸려왔다. 이 할머니의 구조를 요청하는 112 신고가 지난 2월부터 무려 60건 넘게 접수됐다.
할머니의 국도 배회는 사고 위험이 가장 걱정스럽지만, 매번 출동해야 하는 경찰력 부담도 상당하다. 경찰과 복지 관계자의 대책회의도 열렸다. 그러나 치매 노인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약속이 무색한 현실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난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간병은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책임”이라면서 “문재인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2023년 배회감지기 대여를 발표하면서 “치매 환자 보호망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차도를 걷는 동안 치매를 책임진다는 국가와 지자체는 어디에 있었는가.
관계 당국 조사에 따르면 3번 국도 인근에 사는 할머니는 미혼이어서 남편과 자식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조카가 나섰다. 배회 증세를 고려할 때 누군가 지속해서 돌보거나 보호시설이 필요한 상태다. 할머니는 재산이 상당한 수준으로 파악돼 시설 비용 등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치매 등으로 재산 관리가 어려운 노인을 위한 공공신탁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돈이 있는데도 편히 지낼 수 있는 시설에 못 가는 할머니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경찰의 보호 노력은 다른 지역에 사는 조카에게 막혔다. 경찰은 “할머니의 교통사고가 우려된다”며 보호시설 입소를 권유했으나 조카는 거절했다고 한다. 광주시 치매안심센터도 입소를 추진했으나 역시 조카의 벽에 막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요양보호사가 집을 방문해 돕는다. 이걸로는 역부족이다. 꾸준한 치매약 복용이 필수적이나 상시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건강 상태가 악화한다. 지난 10일 재차 위급 상황이 발생하자 경찰은 정신건강복지법을 적용해 응급입원 조처를 했다.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의료진 소견이 나왔다. 경찰은 행정입원을 모색했으나 또 가로막혔다. 조카의 요청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것이다. 퇴원 이틀 뒤인 지난 14일에만 두 건의 112 신고가 들어왔다.
관련 당국 조사 결과 조카는 후견인도, 부양의무자도 아닌 상태다. 그러나 현실에선 조카가 반대하면 병원 입원이나 시설 보호가 안 된다. 미국이나 일본은 전혀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백종우(정신건강의학) 경희대 의대 교수는 “미국에선 응급입원을 진행하는 경찰과 의료진에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일본에선 지자체와 보건소가 행정입원 책임을 갖는 시스템이 잘 운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가 있어도 누군가 반대하면 실제론 행정입원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시설 입소를 반대하는 조카는 직계가족이 아니라서 부양의무는 면제된다. 홀로 사는 치매 노인은 가족의 보살핌을 못 받고 정부 당국의 보호망도 무력해지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다른 나라처럼 관련 당국이 책임지고 치매 독거노인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시급하다.
할머니의 배회는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할머니 피해뿐 아니라 가해 운전자가 처벌을 받을 수 있고, 할머니를 피하려다 대형 사고가 날 위험도 크다”고 이윤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우려한다. 올해만 60번 넘게 이어진 112 신고가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할머니 국도 방황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