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제국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미국의 변화는 기울기가 너무 가파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질서를 주도했다. 오대양 육대주에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세계 제1위의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부터 태평양의 섬나라, 중동의 분쟁국들, 남미와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미국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지금도 약 80개국에 미군기지와 병역을 주둔시키고 있다. 해가 지지 않았던 19세기 대영제국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지난 80년간 지구촌에서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이를 재촉하고 트럼프 이후에도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은 너무 진보로 흘러가 버려 차기 집권 가능성이 높지 않고, 공화당은 트럼프 추종자가 주류를 장악했다.
소프트파워 기반한 미국 영향력
트럼프 정부 너무 쉽게 무너뜨려
미국 퇴조 이후 세계질서 더 험난
한국, 역사의 과오 되풀이 말아야
사실 미국의 상대적 국력은 2차대전을 정점으로 서서히 하락해 왔다. 2차대전 직후 미국 경제는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는 1949년 소련이 핵을 개발하기 전까지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총생산의 1/3을, 지금은 1/4을 차지하고 있다. 구매력으로 평가한다면 현재 세계 총생산의 15%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후 미국이 주도해 전 세계에 제공해 온 ‘공공재(public goods)’에, 그리고 미국이 추구해온 국제자유질서와 평화,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금융질서,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교역질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 각종 안보동맹 위에 미국은 글로벌 헤게모니를 쥐고 세계 경찰의 역할을 해왔다. 때로 논쟁적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국제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려 했고, 지구촌은 그런 미국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전후 지구촌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유럽과 일본의 부흥, 중국과 인도의 부상으로 미국의 하드파워는 상대적으로 축소됐지만 소프트파워는 여전히 어깨를 겨룰 나라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이를 너무 쉽게, 너무 빠른 속도로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이 설계하고 역대 지도자들이 지켜온 공화국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를 트럼프 정부는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으며 동맹들을 위협하고, 수탈적 관세 협상, 투자를 강요하며 이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에서 미국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이며 당분간 미국을 대체할 파워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의 권위와 역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근대사에서 미국은 대표적 포용적 국가였고 그것이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중국의 위협보다 미국이 더 경계해야 할 일은 내부의 포퓰리스트 국수주의 부상이었으나 미국정치는 이에 실패했다.
이제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 대비해 나가야 할 때다.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세계질서는 지금보다 더 불안하고, 더 고달플 것이란 점이 문제다. 힘의 공백이 생긴 자리에선 그만큼 더 갈등이 폭발하고 폭력이 쉽게 나서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아르메니아의 학살이 진행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저물자 유대인 학살이 왔다. 유럽은 내부의 문제로 세계질서 형성에 크게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 같고, 중국의 힘으로 누르려는 외교, 러시아의 저돌적 공격성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될 때까지 많은 혼란과 대립, 무릎 꿇리기, 심지어는 무력충돌의 험난한 시간을 지나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는 소프트파워 없이 군사력·경제력에만 의존하는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는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약화와 권위주의의 부상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서유럽, 일본, 한국, 대만은 전후 미국의 안보 보호막 속에 번영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는 이 나라들에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제조업 협력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우방국들과 연대해 자유무역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경제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서 점점 불안해지는 세상에서 생존하며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주 국방력의 강화, 남북긴장 완화, 외교의 실질적 다변화를 위한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 국제질서 대전환기에 국내 분열과 갈등 심화는 치명적이다.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지금은 나라의 지혜와 힘을 모으며 통찰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