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를 빼고 한국 경제를 얘기할 수 있을까. 삼성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월드 클래스 기업이다. 2024년 매출 301조원, 영업이익 33조원을 기록했다. 한국 기업 중 단연 압도적 1위다. 동시에 수출의 20%가량을 차지하면서 국민 경제에 크게 기여해 왔다.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달성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 삼성은 미국의 브랜드컨설팅 회사 인터브랜드가 발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순위에서 2021~2024년 4년 연속 5위를 차지했다. 1~4위는 모두 미국의 빅테크 기업인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구글이다. 비미국계 브랜드 중에서는 일본과 독일 기업들을 제치고 삼성전자가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또한 2022년부터 미국 특허 등록 1등을 3년 연속 달성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과시해 왔다.
사실 1990년대 초까지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류기업이었다. 그러던 삼성전자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한 것은 93년 신경영을 통해 디지털화·글로벌화라는 패러다임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통해 ‘21세기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라는 전략 비전을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제품·사람·경영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특히 아날로그 시대에는 소니 등 일본 기업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디지털 기술에 집중 투자했다. 21세기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할 것이라는 통찰력이 밑바탕이었다.
노력과 투자는 결실을 톡톡히 거뒀다. 삼성은 98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디지털TV를 출시했다. 21세기 들어 디지털 기술이 대세가 되면서 2006년엔 소니를 제치고 TV 산업에서 세계 1등이 됐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연구개발(R&D)·마케팅·디자인 등 소프트 경쟁력 강화에 총력 투자를 했다. 품질을 높여 자체 브랜드의 프리미엄 제품으로 발돋움하려는 목적이었다. 무형자산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21세기 지식기반경제에 부합하는 전략이었다. 이렇게 육성한 기술력과 디자인 역량, 글로벌 브랜드를 기반으로 삼성은 월드 클래스 회사로 도약했다.
이건희 “내 진심, 여섯 번 말해도 기억 못 해”
사실 이건희 회장의 구상은 93년 신경영 이전에 싹텄다. 87년 12월 회장 취임사에서 이미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 ‘신경영 기법 도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임직원에게 잘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92년 말 고위 임원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지금까지 한 차례의 취임사와 다섯 차례 신년사를 통해 내 진심을 전하려 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93년 이 회장은 수뇌부를 미국 LA에 데리고 가 매장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삼성 제품을 보여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면서 집중 교육을 통해 의식구조 변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잘 바뀌지 않자 충격요법을 도입했다. 7시 출근, 4시 퇴근제를 통해 변화를 체감시켰다. 품질 불량이 난 휴대폰을 전면 리콜해 무선사업부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린 ‘휴대전화 화형식’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이를 통해 무선사업부는 물론 삼성 전 직원들에게 품질 중시 경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바뀌었다. 신경영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10년 이상 일관성을 갖고 조직구조와 문화, 가치체계, 평가와 보상 시스템 등 경영 시스템의 주요 요소를 ‘품질 최우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정렬시켰다. 꾸준히 핵심 인재를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으로써 삼성전자는 21세기 들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신경영을 통해 고품질·저원가·스피드라는 복수의 경쟁우위를 동시에 달성했다. 예를 들어 메모리반도체 부문은 경쟁자보다 원가가 현격히 낮으면서도 최신·최고 수준의 제품을 경쟁자에 앞서 출시했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1등을 30년 이상 지켜낸 비결이다.
삼성전자가 이룩한 ‘원가는 낮은데 제품은 최고’란 결과는 언뜻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조합이다. 이처럼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요소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을 ‘패러독스 경영’이라 부른다. 신경영 후 이건희 회장 시절의 삼성전자는 특유의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을 정립했다. ▶거대 조직이면서도 의사 결정과 실행 속도가 빠르고 ▶다각화 및 수직 계열화되어 수많은 사업군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 사업 하나하나의 경쟁력을 극대화했으며 ▶파격적 인센티브, 도전 의식 등을 중시하는 미국식 경영과 세심하게 관리하는 일본식 경영의 장점을 조화시켰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대규모 투자는 소유경영자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운영상의 결정 등은 최지성·권오현 같은 역량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의사 결정 속도를 높였다. 또한 도전적인 목표를 세우고 위기의식을 공유해 임직원들의 열정을 끌어냄으로써 실행 스피드를 끌어올렸다. 각 사업은 글자 그대로 정글 같은 경쟁에 던져 넣어 역량을 키웠다. 내부 부품 생산조직으로부터 납품받는다고 해서 외부 거래처에 비해 별다른 특혜가 없었다. 삼성전자 내부 사업조직과 계열사들이 “외부 고객도 내부만큼 혹독하지 않다. 내부가 더 무섭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제품의 원가를 낮추고 품질을 개선·차별화하는 혁신 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부품과 세트(완제품 또는 부분품)의 경쟁력을 모두 높이는, ‘복합화를 통한 시너지’를 창출했다.
월드 클래스로 도약한 삼성전자는 2014년 이후 매출 증가세가 눈에 띄게 둔화했다. 2023년 이후 본격화한 인공지능(AI) 혁명에 빠르게 올라타지 못해 30년 이상 지켜온 메모리 반도체 1등의 자리를 SK하이닉스에 내줄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30년간 삼성전자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는 기술적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었고, 2007년 이후 애플이 선도한 스마트폰 혁명에 빠르게 올라탐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 성장의 도약을 이뤄냈다. 하지만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고 후임 이재용 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법적 리스크에 10년 가까이 직면하면서 디지털·스마트폰 혁명을 뛰어넘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인 AI 혁명의 초창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삼성 내부에 단기 성과주의·관료화 팽배 AI 혁명의 핵심인 AI 가속기를 선도하는 엔비디아가 AI 데이터센터 투자 광풍의 수혜로 시가총액 세계 1위로 떠올랐고,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부가가치 메모리(HBM)를 거의 독점적으로 납품한 SK하이닉스는 올해 37조원가량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보인다. AI 가속기를 만들어 주는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제조 기업인 대만의 TSMC는 점유율을 급격히 높여 왔다. 반면에 삼성전자는 아직 엔비디아에 HBM 최신 버전을 납품하지 못했다. 조 단위 적자에 신음하는 파운드리 사업은 TSMC와 점유율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전영현 부회장이 반도체 부문 새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하면서 기술 경쟁력 부활을 최우선 순위로 올려놓았다. 그 결과 HBM과 파운드리 분야에서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새 고객 확보를 통한 실적 개선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SK하이닉스와 TSMC를 따라잡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10년간 과거 인텔과 같은 일류 기업의 몰락 과정에서 흔히 나타났던 재무 중심의 단기 성과주의가 팽배하고, 조직의 관료주의화가 진행된 것 또한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2019년 HBM 선행기술개발팀을 해체한 것은 단기 성과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관료주의화로 인해 구성원들은 “삼무원(삼성 공무원)이 됐다”고 자조한다. 심지어 우수 기술 인재가 국내외 경쟁업체로 이탈까지 하고 있다.
이제 이재용 회장의 법적 리스크는 해소됐다. 단기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과감히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기술 경쟁력 회복을 위한 투자를 단행할 시점이다. 동시에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관리의 삼성’으로 대변되는 경영 의사결정 구조와 조직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재점검과 개혁이 필요하다.